다 덮어놓고 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다 덮어놓고 일만 하는 건 싫다고. 영영 그렇게 사는 건 싫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 게 싫다기보다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때 만나던 사람이 그랬다. 괜찮다고. 지금만 그런 걸 거라고. 어른이 되면 다를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그다지 다르진 않았다. 여유롭게 살고 싶은데 여유롭게 살 수 있는 형편에도 여유롭게 살 수가 없다. 뭐든 해 본 사람이 할 줄 아는 거라고. 내 사전에는 여유가 없다.
이제는 꿈이나 비전 따위도 없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됐으니까. 다 이뤄버렸으니까. 그래서 열정과 패기가 없다.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새로운 꿈, 비전. 잘 찍고 싶으면 잘 찍은 그림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잘 찍고 싶어요.‘ 하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잘 찍은 그림을 다 보지 않으면 퇴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더 어른이 돼서도 그대로이지 않길 위해서다. 결국 뼈와 살을 갈아 노력하는 것. 내가 어쩌면 제일 잘하는 것. 그게 답이었던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게 그냥 작은 발버둥일지라도. 발버둥으로 그친다면 차라리 사람이 되는 걸 포기하겠다. 아니 어쩌면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닐지도.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구의 증명> 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