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삽화도 조울 삽화도 오지 않는 채로 1년 반을 넘게 지내고 있다. 나아지면서 나는 내 문제들을 좀 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는데 그 시작은 내 중심을 그동안 남에게 두었다면 이제는 나에게 둘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특히 누군가가 한평생 나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보였고 그로 인해 상처받았던 내가 보였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어느 순간 화가 나면 나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하여 내가 속상해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감정들을 처리하고 해소했고 나는 서른을 한 달 앞둔 최근까지도 같은 패턴으로 끊임없이 상처받는 줄도 모르고 당했다. 누가 스물아홉까지 여기저기 후려쳐졌다는 걸 믿을까?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걸 알고 나서는 참을 수 없었고 결국 나는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 날, 엄마는 물건을 많이 산다는 이유로 비정상이라며, 누가 너를 정상인으로 보냐며 ‘또라이’, ‘미친년’, ‘시발년’, ‘정신병자’라고 했다. 내가 아팠던 시절에 대해 ‘그때 그냥 죽지 그랬어’라고 하는 엄마를 보며 기가 차다 못해 안타까웠고 엄마면, 아니 엄마니까 저런 말은 하면 안 됐다고 생각했다. 폭언들 중에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말 것’과 ’다시는 얼굴 볼 생각을 하지 말 것‘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내가 집을 나오긴 했지만 내가 나오기로 결심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사과를 해달라고 했으나 사과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끝났다.
의사선생님께 잘못됐던 모든 걸 말했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직접적 성추행과 엄마의 방관까지도.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의사선생님은 두서없는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고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다 내 탓을 하고 살았냐며, 아마도 다른 걸 못하니 다 내 탓을 하는 게 제일 쉬워서였을 거라고 하셨다. 잘 나왔고 잘 나왔으니 지금은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를 위해 결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드 때도 없이 울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발악을 하며 차도를 떼굴떼굴 굴러다니고, 자살시도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누구한테나 힘들 수 있는 일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 힘들어한다면 나는 몇 번 해봤으니 죽음이라는 곳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접근하고 있었다. 아빠와 동생과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가족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혼자인 것 같았다. 나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루는 경찰들이 출동했고 우리는 성모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입원 당시 주치의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교수님이 그러셨다. 왜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안 했냐고. 내가 해준 이야기만으로는 왜 그렇게 자책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자책을 심하게 했다고 그래도 문제를 문제라고 바로 인식하게 된 걸 보면 좋아지긴 좋아졌나 보다고. 그래도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장 입원을 하자고 하셨다. 당장 올라가자고 하시는 경우는 많이 없고 특히 입원 환자를 잘 받지 못하는 요즘 당장 올라가자고 하시는 게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입원을 하고 싶었다. 안전하게 있고 싶었다. 그런데 입원만이 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믿고 싶었다. 감정들이 조금만 가라앉는다면 나도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교수님, 근데 저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한 것 같아요.
잘못된 관계이지만 그게 가진 것의 전부였고 전부일 것만 같으니까. 하지만 잘못된 관계는 잘못된 관계일 뿐이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