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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May 23. 2021

치열하게 달렸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오랜만에 홍콩에서 알바를 함께 했던 동생을 만났다.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했다. 물론 내가 요즘 평소보다 좀 더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를 보는 것만으로 난 그 시절의 나를 만났고 그 시절의 우리를 만났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AFP에서 일하고 끝나자마자 새벽 3시까지 알바를 뛰었던 시절에 알바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차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규모가 꽤 컸고 직원도 많았다. 오빠들도 있었고 언니들도 있었고 동생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홍콩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나와 그 친구만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홍콩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학생 비자로 홍콩에 있었는데 학생 비자로 일하는 건 사실 불법이었다. 경찰이 뜨면 그날은 나가지 못했다.


불법인 걸 알면서도 일했던 건 우리에게 그만큼 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학교만 다닐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일해야 내일을, 또 모레를 살 수 있었다. 하루라도 더 일해야 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쪼개고 쪼개 모든 시간을 시간당 수당으로 계산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시간당 수당이 더 셌던 과외를 하기 위해서 포차에서 오픈부터가 아닌 저녁 피크 시간 때부터 마감까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추가로 필요한 날에만 과외를 하고 알바를 했다. 보통 주말이 그랬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쭉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들만이 필요한 날에는 과외를 안 하고 알바를 했다. 시간당 수당은 과외가 더 셌지만 총 수입은 알바가 더 셌다. 일하는 시간 대비 비효율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항상 그날 벌 수 있는 제일 많은 돈을 벌수 있게끔 스케줄을 짰다. 우리는 노는 것도, 쉬는 것도, 자는 것도, 세상 모든 것을 시간당 수당으로 계산했지만 서로에게만큼은 내가 좀 더 힘들어도 나머지는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가진 거 하나 없었고 을 중에 을이었다. 서로를 챙기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신경 쓰던 사람들. 진상 손님들을 상대했던 날, 저녁 당번 오빠들은 내 저녁밥에 계란말이를 추가해 줬고 그 계란말이 위에는 케첩으로 그려진 스마일이 있었다. 아직도 그 스마일이 눈에 선하다. 진상 손님들 썰은 다음에 한 번 풀어봐야겠다. 누군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날엔 그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거나 좋아하는 간식을 건넸다. 누군가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날엔 그 친구가 든 무겁고 뜨거운 것들은 다 뺏어 들었다. 한 명이라도 고민이 많은 날엔 알바 끝나고 모두 모여 술을 마셨다. 안주로 치킨이 먹고 싶어 포차에서 염지한지 좀 된 치킨을 업소용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쓰레기 버리는 척 몰래 빼돌린 적도 있다. 치킨 두 마리를 도대체 몇 명에서 나눠먹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이 정말이지 끔찍이도 싫었는데 추억으로 남아서 다행이야.


그렇다. 우리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달렸고 같이 웃고 울었다. 현재 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만은 늘 함께이다. 뭘 하든 살아남을 강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란 건 알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힘든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라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얼마 전, 한 오빠에게 안부 전화를 했을 때,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어두운 세계의 일은 아니라며 웃더라. 오빠, 언니, 동생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일하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생에게 밥을 사주고 꽃과 꽃병을 선물했다. 돈 걱정 없이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왔다. 정말 감사하다. 사실 그날 그 친구에게 한 선물은 그 시절의 나에게 하는 선물이었고 그 시절의 우리에게 하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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