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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Sep 19. 2022

알 수 없는 현상들

 한 식당에 손님으로 스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스님이 냉면을 시키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냉면은 고기를 덮어서 주는데 상대가 스님인지라 식당 주인은 난감했다. 

식당 주인이 스님에게 말하기를, "스님, 고기는 뺄까요?" 그러자 스님이 식당 주인의 귀 가까이 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밑에다 깔아 주시오."     


   

세상에는 많은 알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린다. 

혹은 나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었을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들은 믿어지지 않고 때로는 터부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현상들을 오히려 연구한다. 그리고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결론도 내린다. 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거나 어떤 기사를 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 들은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도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고 동영상으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었다.     


그중에 흥미를 끄는 것으로 유체이탈(遺體離脫)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관심이 갔었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유체이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많은 다양한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그런 비이성적이게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둘만하지 않는 유명한 대학교 교수, 의사, 과학자, 교육자 등도 있다. 그들은 우연하게 누군가의 신비로운 경험을 접하고 관심을 두다가 연구를 할수록 확실한 증거가 나오자 아예 본업보다는 유체이탈 연구에 더 몰두한 사람들이다.  


유체이탈 사례 중에는 심장마비로 심장박동이 멈추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육체에서 분리된 채 자신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사람을 본 경우. 

심장마비와 호흡 정지 상태의 환자가 깨어나서 유체이탈을 경험했다며 수술실과 수술에 참여했던 의료진, 그리고 자신의 소지품이 있었던 위치를 정확히 묘사했다는 의사의 보고서. 

물리학자가 지병으로 생명이 위험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며 누워있는 자신을 본 경험담. 강물에서 래프팅을 하다가 물에 빠져서 의식을 잃은 뒤, 물 위 공중에 떠서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남편이 자신의 몸을 통과해서 물에 뛰어드는 것을 본 경험담. 

어느 사업가가 수백 번의 유체이탈을 경험했는데, 주로 잠들기 전에 이탈을 하여 자신의 지인들을 방문한 경험을 연구한 미국 대학의 교수.

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괴테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유체이탈 경험을 글로 전하고 있다.     

  

많은 사례와 권위있는 사람들의 확인은 더 이상 그런 현상을 터부시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만사를 제쳐두고 거기에 몰두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보통은 우리의 의식이 다다르는 곳까지를 상식과 이성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무섭고 현실 세계만도 벅차서 그 이상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한테만 일어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체험한 것을 보게 된다. 마치 내가 교통사고로 중환자가 되어보지 않았기에 그것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과 같다.      

  

1907년 미국 의사 던컨 맥두걸의 실험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매사추세츠 병원에서 임종 환자 6명의 체중을 정밀한 저울로 측정했더니 죽음의 순간에 이들의 몸무게가 갑자기 21g 줄었다는 것이다. 개 15마리에게 똑같은 실험을 했으나 체중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사람에겐 영혼이 있지만 개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맥두걸의 실험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03년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제작한 ‘21g’이다. 초콜릿 바 하나의 무게 21g 때문에 겪는 인간의 고뇌와 죄의식을 담고 있다. 

영화가 나온 후 맥두걸 실험에 대한 검증작업이 이뤄졌다. 2007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측정했더니 임종 시 일어난 체중 변동은 21.26214g이었다. 

물론 이 사례들에 대해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지구의 가장 중심부인 내핵은 1,600km 깊이에 있고 5,000℃ 이상의 온도를 내는 고체 덩어리이다. 이와 같이 진실은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사람은 동물과 같이 육체가 있다. 그러나 사고(思考)를 하는 동물이다. 동물도 어느 정도 사고를 하지만 사고라고 말하기도 힘든 일차원적인 목적의 사고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사고이다. 

동물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시(詩)를 읊지 않는다. 사고를 하고 시를 읊는 행위는 정신 세계다. 그래서 사람을 육체와 정신의 결합으로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마음을 혼(魂)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육체, 정신을 지배하는 무언가로 말하기로 한다. 혼은 지(知), 정(情), 의(意)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성, 감정, 의지를 말한다. 우리가 평소에 쉽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영(靈)은 혼과 다른 의미로 쓰인다. 영은 죽음과 관계가 있고 죽은 후 육체와 분리된다. 

유체이탈에서 말하는 것이 영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 갑작스러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잠시 혼이 나갔다”라고 말하지 영이 나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은 그래서 보이지 않고 느끼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럼, 영(靈)에 대해서 터부시할 것인가? 보이지 않고 죽어야지 알 수 있는, 아니면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무시할 것인가? 

선천적 맹인은 보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른다. 우리가 명확하게 보는 세계는 맹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영(靈)의 세계도 영에 대해서는 선천적인 맹인인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는 세계로 치부된다.


유체이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죽은 후, 즉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을 한다. 그다음 부터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가 갈린다. 그거야 말로 연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고 영이 우리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체험과 권위있는 사람들의 확인은 분명히 영은 존재하고 죽은 후 어떤 것이 새롭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터부시할 수 있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죽으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별로 고민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닥칠 가장 큰 문제이다. 내 영이 어디로 갈 것인가? 육체와 분리된 영은 어디로든 가야한다. 많은 영들이 있는 어느 곳으로.

삶에 지치고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하기에는 100년의 삶 이후의 또 다른 삶은 너무도 길다. 

내가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영에 반영되어 불멸하는 삶의 여정에 뗄 수 없는 꼬리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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