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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Oct 15. 2022

보이지 않는 실체

예전에 길거리를 가다가 갑자기 작은 백을 옆에 둘러맨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도(道)를 믿으십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멍하게 서있으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바쁘다고 물리쳐도 집요하게 쫓아오며 말했다. 나에게 기운이 보통이 아니라는 둥, 인상이 좋다는 둥 칭찬을 하는데, 괜히 으쓱대었다가는 더 처절한 추적이 시작된다. 그래서 몇 번 그런 경우를 당하면서 처음부터 단호하게 손을 내젓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한 지인은 이들에게 “도는 스스로 깨우치는 것 아닌가요?”라고 했다가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버스 안까지 따라오는 바람에 정신줄을 빼앗겼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2인 1조로 다녔고 소박한 차림에 말을 빠르고 또박또박 잘했다. 그러나, 내용은 나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어서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들의 관점에서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있고 불완전한 것이 있다. 사람은 불완전한 것에 속한다.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킬 확률은 100% 가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100% 믿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될 수 있다. 

미래예측은 불완전하다. 내일의 날씨, 주가, 나에게 닥칠 재난 등 모든 것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완전한 것도 있다. 

내일 태양이 뜨는 것은 확실하다. 모든 생물이 죽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물이 수소와 산소로 되어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믿음은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갈등이 없다.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한 것에 흔들린다. 불완전한 것들에 우리의 믿음이 깨지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믿음은 점점 엷어진다. 사람들에게 많이 배신당한 사람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된다. 

  

어떤 것이 절대적 진리이기만 하면 우리는 편안하게 믿을 수 있다. 내일 태양이 뜰지 않뜰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이 산소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은 지 조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진리들.      

이 절대 영역 중의 하나이면서 그 영역을 관장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신일 것이다. 만물을 설계하고 지금도 운행하고 있는 존재이다.  

신이 없다는 믿음은 고민하고 조사할 필요가 없는 절대 진리인가? 

신을 믿는 수많은 사람이 황금시간대인 일요일 오전에 산, 들, 바다로 나가 일주일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조용히 머리와 수염을 깍고 옷을 단정하게 하여 어디론가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존재가 없다는 나의 믿음의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면 지난 수천 년간 똑똑한 사람들이 믿어온 것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시작이다. 

아니 도대체 그게 무어라고 때로는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결심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고 왜 그동안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몰랐는가를 후회한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외면하면 공허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계를 인정해야 완전함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결심이 자신이 한 가장 크고 위대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지만 무언가를 실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다. 

믿음의 바탕은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되는 않는 것이다. 무언가 불확실하게 보여서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힘든 것을 의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신이 하늘에서부터 우리 앞에 ‘짠’하고 나타난다면 이제는 정말 모든 사람이 그 신을 인정할 수 있을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그분이 선택한 여러 대리인들에게 직접 그 실체를 드러내 보였지만, 옆에서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 부자 청년은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을 물었더니,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자 근심하다가 결국 거절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보여주고 가르침을 주는 과정에서 예수가 신이고 메시아임을 인정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자 모두 도망가서 예수의 제자였음을 숨기고 살았다.  

신을 직접 보고도 그냥 환영이나 신기루로 치부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떠한 기적이 보여도 환상으로 치부하려고 할 것이다. 닫힌 마음이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자신의 실체와 한계를 알고 절대자와의 관계를 깨닫는 사람이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간절함으로 그분이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것이다. 마음속에 찾아온 그분을 계속 품고 그분께 의지해 나가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분은 시간을 초월할 것이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약 8분이 걸린다. 우리가 지금 보는 태양은 8분 전에 출발한 빛이다. 우리의 시간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태양과 지구를 한발씩 걸치고 있는 거인에게는 시차가 없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40조km)이므로 지금 우리 눈에 보여지는 그 별빛은 4년 전의 빛이지만 신에게는 그 차이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성경에는 신을 알파(A)와 오메가(Ω)라고 했다. 이것은 시작과 끝이라는 말이다. 

신의 영역은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기에 영원하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장수(長壽)의 개념이 없다. 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좋으나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신이 이해로 해석되면 더이상 신이 아닐 것이다. 마치 개미가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개미가 인간을 다 이해했다면, 이미 더이상 개미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보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크다. 우리의 사고의 범위를 벗어나는 영역에 신이 있다. 

그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해가 아닌 간절함과 의지, 그리고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우주를 손에 올려놓고 볼 수 없다면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가부를 논할 자격이 없다. 그냥 한번 믿어보는 것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그 호랑이는 나를 해치는 호랑이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호랑이이다. 

우주와 비교하여 미세먼지만한 지구에서 대한민국의 어느 한 지역에서 욕심, 미움, 비난, 시기를 가지며 아옹다옹 살고 있는 나. 미미한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 신이 다가온다. 내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회의주의가 아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어느 연예인이 결혼하여 자녀를 가지자 인터뷰에서 누가 1조 원을 준다고 해도 자녀보다 귀중하지 않다고 했다. 누가 10조 원, 아니 그 이상을 준다고 해도 신이 살아있다면, 그분을 믿는 믿음보다 귀중하지 않을 것이다. 10조 원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필요한 것이지 죽어 없어지면 필요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장수해도 100년밖에 그 돈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죽은 다음에 더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믿음으로 인해서 10조 원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죽은 이후부터일 것이다.


믿음은 마치 도인(道人)이 되는 것이다. 깊은 묵상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상의 물욕과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수행을 통해 점점 더 도인다운 도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세상에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고 직접 체험도 하지만 내안에 그분이 있다는 믿음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내가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으로 들어간다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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