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대본 제출 기한이 임박했다.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등록해 벌써 종강을 한달 남짓 앞두고 있다. 9월 달 가을지나 한 해를 넘겨 봄이 됐다. 이제 진짜 단막극 대본을 써야 한다. 어릴 때 재밌게 봤던 EBS 어린이 드라마 <깡순이>를 쓴 안금림 작가님이 수업을 맡았다.
드라마는 인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님이 자주 하신 말이다. 인간의 변화. 한 사람이 변화는 과정을 그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인간이 과연 변화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 고쳐쓰는 게 아니라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그러니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만큼 대단히 큰 사건이다. 작가님의 이 얘기는 다시 나를 파고 든다.
먼저 내가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이고 앞으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고 싶었다. 그럴려면 작품을 쓰는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컸다. 기초반에서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그게 내가 될 수 있다.
스터디 모임도 다르지 않았다. 구성원 끼리 서로 상반된 입장이었다. A는 휴학 중 그냥 한 번 수업을 들어보려고 온 친구. B는 4년간 영양사로 일하다가 퇴사한 친구. C는 심리상담사. D는 대학생으로 여러 진로 중 작가를 염두하는 친구. 그리고 나. 그렇다 보니 A는 수업을 관두고 나갔다. 스터디를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보다 일정을 맞추는 일이 더 어려웠다.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밤 10시, 11시에 스터디를 시작했다. 좋은 동료를 얻는 것도 좋은 동료가 되는 것도 뭐하나 쉽지 않았다.
수업은 7시퀀스 작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구조 중심 작법으로 7단계를 거치면 작품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따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 나온다. 하지만 이 틀에 맞게 작품을 짜는 일은 쉽지 않다. 큰 틀에서 3막 구조와 비슷하면서 다른 구석이 있다. 매 시퀀스마다 달성 목표가 있고 이를 이뤄가는 과정이 달랐다. 다양한 작법이 존재하는 만큼 이 방법도 익히면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끈기를 갖고 매달렸다.
그런 만큼 작품의 진전은 더뎠다. 그런데 재밌다.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 전체를 조망하는 일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았다. 로맨스 코미디 단막극 <손절 극복 로맨스>의 수수께끼는 남여 주인공의 로맨스가 모든 행동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품은 슬럼프에 빠진 남여 주인공 때문에 자꾸 성장 드라마로 흘러갔다. 이를 바로 잡는데 시간이 걸렸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도 로맨스여야 하고 밥을 먹어도 무조건 연애에 입각해 먹어야 하는 점이 수수께끼의 답이었다. 답을 얻기까지 정말 괴로워 미칠지경이었다. 시놉시스를 다듬긴 다듬는데 땅집고 헤엄치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스터디 구성원들도 다들 초보이기 때문에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답을 찾았을 때는 정말 기뻤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내가 로맨스를 썼다는 것이다. 난 분명 악에 받쳐 있었다. 씩씩대며 퇴사했고 국비지원 요리학원에 갔다왔을 때는 부아가 온몸을 휘감았다. 좋아하는 장르도 누아르다. 그런데 첫 습작이 로맨스 코미디라니. 이렇게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간다. 진정한 인간의 변화인가! 무엇보다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았다. 작품을 쓰는 내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