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연말. 가혹할 만큼 힘들다. 절망의 크리스마스다.
이럴 때마다 박찬욱 감독님을 떠올린다.
시간은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웹툰 제작사에서 스토리 보조 담당자를 뽑는 공고가 올라왔다. 마침 드라마 작가 과정 연수반 수업의 개강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시간이 괜찮았다.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 먹고 보조 작가를 해보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 얼른 지원서를 준비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제출했다. 서류 합격 연락이 왔다. 이제 과제 전형이다. 포트폴리오에 기제한 작품 기획서를 바탕으로 1화 ~ 3화 대본과 업계 동향에 관한 분석 레포트를 제출해야 한다. 열흘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과제 작성에 매달렸다. 결과는 합격. 이제 면접이다.
11월 15일 15시. 서초구. 대략 1시간 반 가량의 면접이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면접에 임하면서 느낀점은 질문이 좋았다는 점이다. 제출한 이력서, 자소서, 포트폴리오, 과제를 꼼꼼히 살핀 내용들이 질문 곳곳에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입사후 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 면접은 드물다. 면접까지 한달 정도 소요되는 시간동안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는데 큰 고비를 넘긴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당치킨을 샀다. 애써 면접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 잘 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11월 26일 면접결과가 나왔다.
-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면접에도 불구하고,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면접에서 보여주신 열정과 역량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지성 님의 앞날에 빛나는 나날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개쌍욕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나는 검고 깊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12월 연말. 크리스마스. 하나도 즐겁지 않다. 아주 어릴적을 제외하고 더 이상 크리스마스가 주는 판타지가 없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당 미사에도 가지 않는다. 내 방에 드러누웠다. 그 끝에서 박찬욱 감독님을 마주한다. <JSA 공동 경비 구역>을 연출하기 전까지 지난한 시기를 보냈던 박찬욱 감독님도 이렇지 않았을까. 정성일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어느 영화의 시나리오를 빼앗긴 박찬욱의 수모는 피를 토할 지경. 어느 영화 잡지 속 박감독님의 인터뷰도 기억난다. 그의 두번째 작품 <삼인조> 개봉 쯤이었다. 첫 작품 <달은 해가 꾸는 꿈> 이후로 5년만의 차기작이었다. 그는 5년간 13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 악물고 1년에 두 세 작품씩 써낸 것이다. 이제 또 다음 작품까지 3년이나 4년으로 시간을 좀 줄여 보는 것이 목표라고 애기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정말 영화를 계속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던 같다. 그럼에도 그 버거운 시기를 박찬욱 감독님은 견뎠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며. 그가 만든 영화 속에서 한편 한편 담겨 있는 그의 삶을 엿본다. 얼른 다음 작품을 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