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두 번 째 회사, 마지막 회사?

by 이지성

오전 8시 알람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이불 속에 얼마간 누워있다 벌떡 일어난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소중한 시간을 송장처럼 보낼 수 없지. 30대에 접어 든 후 시간을 함부로 보내고 싶지 않다. 나태함은 사라졌다. 좌골신경통을 가라 앉힐 스트레칭을 한다. 오전 10시 도서관 도착. 길고 탁 트인 공용 테이블에 자리 잡는다. 노트북과 공책을 가지런히 올려 둔 후 홀가분한 몸으로 커피를 사러간다. 따뜻한 햇살 아래 느긋하게 보내는 오전 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날 컨디션에 맞게 선택해 시작하는 하루가 참 좋다.


특이 사항이 없는 날에는 신작 탐색 보다 인생 작품을 다시 본다. 네이버웹툰 <이두나!>를 참 좋아한다. 전직 아이돌 두나가 연하남 이원준과 펼치는 캠퍼스 로맨스이다. 처음 볼 때는 민송아 작가님의 작화와 인물 표정에 빠졌다. 이 후부터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물의 전후가 돋보였다. 두나는 아이돌을 관둔 후의 모습을 비추었고 최이라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며 소위 말하는 갓생에 집중한다. 그들 각자의 선택과 과정이 드러나며 감정이 얽혔다. 그렇다. 인생도 어떤 계기로 선택을 내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두나와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2번의 퇴사를 결심 하기까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때를 되돌아 본다.


“캐릭터가 어떤 스테레오 타입에 속하는지 확인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웹소설 작품을 웹툰화 하기 위한 작품 선정 회의에서 였다. 단행본 한 권 분량을 읽은 후 내용을 간단히 정리 한 결과였다.


“스테레오 타입같은 어려운 단어 쓰지마. 너 하나도 안똑똑해 보여!” 배불 뚝이 김이사가 내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작은 회의 실은 영화 <아가씨>에서 봤던 지하 고문실이 따로 없다. 웹툰 제작사로써 더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프로듀싱하기 위한 발전적 교류는 없고 모욕만 이뤄졌다. 어느 날은 이랬다.


”다시” 이사가 짜증내며 ‘품의서’를 던졌다. 나는 이곳 저곳 펜으로 찍찍 그어진 ‘품의서’를 주워 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까지는 내가 챙기지 못한 것이 있겠지 반성했고 다섯 번 째 부터 ‘아 저새끼가 지금 날 엿맥이는 거구나’하고 분노했다. “다시”이어진 고문 행위는 총 열 번에 이르러 끝났다. 열 번에 걸쳐 수정된 품의서는 딱히 다른게 없었다. 어떤 작품의 작가가 사용할 클립스튜디오 배경 추출 보조 프로그램 구매 내용을 반복할 뿐이었다. 영화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여러번의 테이크를 찍는 행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었다. 종이가 아까웠다. 다음은 대표. 대표는 형태소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대표가 작가 출신이란 이유로 입사를 결정했는데 이것이 강점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앞으로 회사가 펼쳐나갈 작품의 방향성, 사업 등 비전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대신 개인 노트북과 엑셀 사용법을 내게 물어 보았고 참조 메일과 업무 담당자와 직접 주고 받은 메일을 헷갈렸다. 작품을 보는 일은 즐겁지만 만드는 일은 전혀 즐겁지 못했다.


첫 회사였던 어느 매체사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대표는 내게 표정이 재수없다고 했다. 과장은 쓸모 없는 쓰레기들, 예를 들면 먹다 남은 견과류, 안쓰는 비품을 내게 투척했다. 여러 용도로 난 그들의 쓰레기 통이었다. 더운 여름 에어컨에서 흘러나온 물을 사무실 사정상 밖으로 흘려 보내지 못하고 물통에 모았다. 잔뜩 모인 물은 흘러넘쳤고 그 때마다 튀어나가 물을 버렸다. 과장님은 디자이너라서 그때마다 팔목이 아팠고 한 두 달 먼저 들어왔다는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키보드 치는 소리가 빨라졌다.


내 방 책상 위에는 포스트잇이 점점 늘어났다.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며 방법을 찾는 것이 탐구”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구분하기”

“와신상담”

“9월 한국방송작가 협회 교육원 접수 시작”


마음을 다독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다짐하기도 했다. 뒤죽박쭉. 작품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될텐데. 왜 쓸데없는 것들이 내 인생에 끼어드는지. 인생이 너무 복잡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면 유언장으로 바뀌었을 포스트잇. 현재는 다 떼버렸다. 노력의 방향과 참아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의 날이 섰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더 잘 할 수 있다.


<영상 시대의 이해> 기말 고사. 답안 제출 후 개별 수업 평가서 수령. 영상이 시대를 어떻게 담고 시대 속에서 영상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대학교 교양 수업.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 각광받는 유튜브, 인스타그램까지 폭넓게 텍스트로 삼는 점이 좋아 열심히 들었다. 그런 모습을 교수님도 좋게 보셨는지 종강날 개별 평가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으셨다.

“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하나 더.

“잘 살아요” 평가서를 받아 나가는 내게 교수님이 말씀 하셨다.


20대 대학생 당시에는 잘 살라는 말이 뭔지 잘 몰랐다. 퇴사 두 번에 갖은 수모를 겪고 말 뜻을 깨닫는다. 일종의 걱정 섞인 격려라는 것을. 그 평가서를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포스트잇을 떼던 날, 책상을 정리하며 되새겼다. 더 잘 하지 못 했고, 잘 살지 못했지만. 앞으로 증명하고 싶다고. 뭘 잘 할 수 있는지 진짜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자소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