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째 집에서 만난 귀한 인연
코로나가 시작되며 하루에 한 번은 인종차별 당하던 시기, 이때의 나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냥 집 안에 숨고 싶고 더 이상 복잡하고 무서운 저 바깥세상 속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 마지막 5번째 집에서 나는 아주 귀한 친구를 만난다.
이 친구의 이름은 '제니(가명)'. 한국인인 이 친구는 내가 이사 온 첫날, 나에게 망고를 갖다 주었다. 원래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친절한 사람인 법. 그때부터 나는 제니에게 마음을 열었다.
내가 새로 이사한 집은 캐나다의 '현대아파트'라고 불릴 정도로 이상하게 한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였다. 지하 1층 빨래방에는 영어와 한국어로 된 안내문이 같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사실 급하게 구한 집이라 가격만 보고 들어갔는데, 이 집은 특이하게 방 2개와 거실 2개였다. 거실은 중간에 천막으로 쳐있어 옆 거실에 머무는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 분은 자기 공간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셨다.
방 1에 사는 제니는 캐나다에 온 지 얼마 안 돼 코로나가 터져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이 집 룸메이트들은 그렇게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첫날 제니가 준 망고를 통해 우리 둘은 마음을 열고 매일 밤 제니의 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제니와 나의 공통점은 무수히 많았다. 둘 다 여행을 좋아했으며 술을 사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넉넉하게 하면 서로 나눠 먹고, 일과를 끝낸 저녁에 다시 만나 안주에 술을 해 먹었다. 아마 우리 때문에 다른 룸메들은 시끄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때 나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집'에 대한 중요성을 알았다. 아무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외박하면 서운해하고, 그리워하며 정을 쌓았다.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문을 빼꼼 열며 조용히 "왔어?"라고 묻는 제니의 얼굴은 가끔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시절의 제니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아주 다정한 마음으로. 아마 제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니는 진짜 웃기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는데 그의 이야기보따리는 정말 재밌었다. 이야기보따리하면 어디 가서 지진 않는 나도 제니한테는 늘 졌다. 공항 노숙한 이야기, 비행기 놓친 이야기, 콘서트 보러 당일로 해외 간 이야기, 사랑이야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라는 안주는 충분했지만, 언제나 술이 부족했다.
캐나다는 술을 일반 편의점에서 팔지 않는다. 'Liquid store'에서만 술을 취급한다. 그리고 리퀴드 스토어는 오후 8시 전에 문을 닫는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그날 술을 집에서 끝내주게 먹을 예정이라면, 미리 왕창 사둬야 한다는 말이다.
술꾼들은 공감할 텐데, 술은 예정대로 마셔지지가 않는다. 그날의 이야기, 기분, 날씨, 컨디션에 따라 알코올 섭취량이 결정된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항상 아쉬워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새벽 2시 정도 된 시간, 술을 사고 싶지만 살 곳이 없는 우리. 우리 집 주변에는 한식당이 줄을 서 있는데, 그중에서 새벽 1시까지 하는 포차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새벽 1시까지면 정말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인데, 거기에 전화를 걸어 혹시 술을 판매하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테이크아웃으로 음식과 술을 판매하는 곳이라 우리는 지금 가지러 간다고 외치며 새벽 2시에 잠옷 차림으로 소주 한 명을 사러 갔다.
캐나다는 소주가 한 명에 2만 원 정도 하는 금값이다. 쉽게 마실 수 없는 주종으로 차라리 맥주를 사는 게 더 이득이긴 하지만, 그런 날이 있지 않겠는가. 취하고 싶은 날.
그날 우리는 포차집에서 산 2만 원짜리 소주 1병을 소중히 들고 집에 가서 또 밤새 놀았다는 술꾼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