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한 절판서들을 수집한 관록이 쌓이다 보니, 종종 주변인들에게서 책을 좀 구해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대개 단순히 다시 읽고 싶어서, 혹은 소장하고 싶어서 부탁을 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간혹 모교의 교수님이나 연구자가 논문 집필을 위한 참고문헌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성공률은 대부분 반반이다. 특히 학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단골 헌책방이 이미 있기도 하고, 자료 검색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서적은 십중팔구 무지막지한 희귀본이다. 부탁을 받고 조사를 하다보면 애초에 검색이 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삼, 사십만원은 훌쩍 넘는다. 대개 이런 경우에 나는 판권이 소멸된 것에 한해서 복사를 해주거나 빌려주고, 나 또한 소장하고 있지 않는 경우는 국립 중앙 도서관을 이용하라고 한다.
누구가에게 책을 찾아줬던 일화들을 떠올릴 때면 가장 쉽게 생각나는 책이 바로 아베 고보의 <벽>이다. 평소에도 나는 아베 고보를 매우 좋아했다. 부조리하고 희극적인 서사,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카프카스러운 불쾌함이 묻어나오는 그의 작품을 즐겨읽었고, 특히나 그의 희곡들을 매우 흠모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소개된 것도 가장 대표작인 <모래의 여자>거나 <타인의 얼굴>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저렴한 가격에 아베 고보의 초기 단편작들을 모아놓은 <벽>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단숨에 그것을 집어들었고, 구매한 당일 그곳에 수록된 모든 소설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번역도 수려했고, 해당 저서의 머리말에 적힌 번역자의 완역에 이르기까지의 일화 또한 소설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이런 대단한 책이 단순히 연구출판 지원사업의 일환으로만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구매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로그에 아베 고보의 단편에 대한 간략한 감상과 책을 포스팅했는데, 댓글로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이 빗발쳤다. 아베 고보의 팬들이 이렇게나 국내에 많은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 때 당시는 내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모든 요청을 거절하였다. 아베 고보의 컬트적인 인기 때문이었을까 이후에도 <벽>을 탐내는 이들은 꾸준히 나타났고, 심지어 내 주변의 지인들마저도 탐을 내기에 큰맘을 먹고 순번을 정해 한명씩 모두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다. 물론 쉽게 구할 수 없는 판본이니 커피 얼룩 한 방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신신당부도 함께 말이다. 과거 문화 탄압이 극심했던 과거의 한국에서 금서를 읽는 모습이 이랬을까? 그러나 지금 그 책은 차익을 남기고 팔아넘긴지 오래다. 이미 읽을만큼 읽었고, 그 때처럼 왕성하게 집필을 하지 않으니 참고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북테크는 고사하더라도 아베 고보의 팬들이 한국에도 상당히 있으니 이 글을 읽는 관계자들이 있다면 뜻을 모아 재간에 힘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을 찾아주던 일화 중 가장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엄청난 고가의 희귀서도, 유명한 문학가의 숨겨진 소설집도 아닌, 아주 작은 동화책 한권이다.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책을 한권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 부탁은 흔하기에 제목과 저자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제목도, 저자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분야를 알려달랬더니 동화라고 했다. 잠시 막막했다. 동화는 내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난관인 것은 출판사도, 어느 나라의 동화인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는 줄거리 뿐이었다.
"드라큘라가 있는데, 책을 먹어요."
너무 막연하기에 나는 이전에 당부를 했다. 저명한 작가의 작품이거나 세계적인 동화책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 아닌 이상, 과거의 동화책은 비슷한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구분이 잘 안되었기 때문에 찾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더니 부탁을 한 그녀가 대답했다. 자신이 어릴 때 할머니와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자신에게 있어 매우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갔고,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점점 할머니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희미해져갔다고 했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께서 하나님 품으로 가셨지만 그 때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던 와중에 문득 기억난 것이 바로 어릴 적 할머니의 집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그 동화책 한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쥐고 있으니 얼마나 막중한 일인가. 게다가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고 했던가, 부담은 조금 되었지만 단순히 책 한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랑스러운 추억을 되찾아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 어떤 고가의 희귀 서적도, 그 어떤 숨겨진명작을 찾는 일도 책 먹는 드라큘라 이야기를 찾는 열정에 비할 바 되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그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제목은 <책 드라큘라> 아주 조그만 사이즈에 파란색 바탕색으로,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져있는 책이었다. 대부분은 구매처를 알려주기만 하지만 왠지 그 책은 내가 직접 구매해서 선물하고 싶어 내가 직접 공수해 그 분에게 드렸다. 그 분은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앉은 자리에서 그 책을 읽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기억을 다시 발견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는 것을. 그날은 왠지 나도 모르게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을 꺼내 읽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