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아픔을 딛고, 다시 피어오른 깊은 커피의 향
안녕하세요. 저는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하고 있는 이윤선입니다.
원래는 방송을 만들던 사람이었습니다. MBC PD로 일하다가 우연히 커피 한 잔에 매료되었고, 그렇게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죠. 2007년부터 테라로사에 합류해 지금까지,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커피 산지를 직접 다니며 좋은 생두를 찾아왔습니다.
2008년, 처음으로 커핑이라는 세계에 들어섰고, 그 향과 맛을 제대로 알아보는 법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인연 덕분에 Cup of Excellence라는 국제 품평회에 한국인 최초로 심사관으로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이 긴 여정 속에서 참 많은 커피와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브런치를 통해 천천히 꺼내보려 합니다.
커피가 제게 그랬듯, 이 글들이 누군가의 하루에도 잔잔하게 닿기를 바라면서요.
제가 준비한 첫 번째 이야기는 '르완다 커피 이야기'입니다.
커피 한 잔을 입에 머금을 때, 그 안에 담긴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 커피가 어디서 자랐고, 누가 손으로 따고 말렸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제 마음은 자주 아프리카로 향합니다.
아프리카 동남부 내륙에 있는
작은 공화국 Rwanda.
이 조그마한 나라의 커피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커피를 통해 삶의 깊은 맛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의 커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르완다는 오랫동안 식민 지배와 내전, 그리고 1994년, 참혹한 대학살을 겪었습니다. 세 달 동안 8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의 사람들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삶의 기반을 잃었고, 당연하게 커피 농사 역시 멈춰버렸습니다.
그 시절, 르완다 커피 생산량은 예년의 5%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에요. 커피는 그저 작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자 삶의 이유였으니까요. 남겨진 사람들은 피폐해진 땅과 텅 빈 마을을 마주했고, 엄청난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따스한 손길이 르완다를 재건하는 일에 나섰고 그들이 다시 씨앗을 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씨앗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커피’였어요.
시간이 흘러, 2000년. 다행히 르완다를 돕고자 했던 USAID(미국 국제개발처)의 지원으로 ‘PEARL 프로젝트’(Partnership to Enhance Agriculture in Rwanda through Linkages)가 시작됩니다.
연대를 통한 르완다 농업의 재건.
이 프로젝트는 커피를 통해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고 대규모 국제 협력의 시도였습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르완다의 '커피'에 집중했습니다.
그전까지 르완다의 커피는 대부분 ‘펄프드 내추럴’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체리를 따서 돌 같은 딱딱한 것으로 문질러 체리 껍질을 벗겨내고 점액질이 붙어있는 채로 말려 탈곡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다기보다 급하게 처리한 커피랄까요. PEARL 프로젝트는 농부들에게 협동조합을 만들도록 유도했고, 거기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워시드 가공법’ 도입과 장비 지원, 기술 교육이 이루어졌고, 커피의 품질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행해지는 방법이라 모두 서툴고 낯설었지만 새로운 가공법은 점차 르완다 전체 커피 생산지역으로 퍼지면서 커피 재배 기술은 물론, 병충해 방지법, 토질 개선법 등 농법에 관한 전반적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고, 어려웠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향이 깊어졌고, 질감이 섬세해지며 커피 품질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커피가 정말로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미국에서 시작된 스페셜티 커피 운동에 주목했던 USAID는 실제 스페셜티 커피 바이어들을 르완다로 초청했습니다. 그들은 르완다 커피를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회복과 재건의 상징으로 바라봤습니다. 이미지가 아닌 품질로 이야기하자는 전략이 통했고, 곧 여러 바이어들이 르완다 커피에 진심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죠. 2006년, PEARL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는 기반을 단단히 다지기에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다음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테라로사가 르완다 마헴베와 인연이 시작된 ‘SPREAD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적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