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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게 제일 쉬울 줄 알았다.

챕터 7

by But Tier

솔직히 쉰을 앞둔 나이에 가족을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티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버팀의 대가에 따른 고통은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육체적인 고통쯤은 그동안의 경험과 훈련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자 그 믿음은 착각이었다.

30대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이, 40대 후반이 되니 큰일처럼 다가왔고

내 마음속 감정을 담는 그릇은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쪼그라들어 예전 같으면 충분히 감당했을 일도 결국 넘치고 말았다.

그렇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감정적, 정신적 타격 앞에서.... 그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그런 아픔엔 익숙해질 수 없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 속에 결국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무너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며칠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다.

검색의 결론은 명확했다. 바로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운 좋게도 그해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어 다양한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내가 겪은 업무배제, 휴직 강요 등은 법이 정의하는 직장 내 괴롭힘의 요건에 정확히 부합했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어떤 고통을 견뎌왔기에 이 일이 법으로까지 규정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 법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것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퇴근 후 노트북 앞에 앉아 덤덤하게 지난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곧 회사를 그만두게 될지도 몰라.”


다음 날, 회사 근처 노무사를 찾아갔다. 1시간에 5만 원이라는 상담료를 내고 내가 밤새 꼼꼼히 정리한 진술서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노무사는 신중히 문서를 검토하더니 근로기준법 제76조의 3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용노동부에 온라인으로 신고하는 방법과 관련 서류 작성 요령을 상세히 안내해주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폭언이나 폭행처럼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경우 회사나 가해자가 부인하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긴 싸움 끝에 실익 없이 끝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보처럼 당하고 싶지 않아요. 회사를 상대로 크게 한 방 먹일 순 없어도, 적어도 지들도 곤란하고 귀찮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노무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받아온 정신과 치료 이력을 바탕으로 산재 신청도 함께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신질환 산재는 승인받기 어렵긴 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신고와 병행한다면 회사가 훨씬 더 무겁게 받아들일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작은 생채기를 내고 싶었다.

완벽만을 추구하는 그들에겐 그 작은 생채기 하나가 곧 ‘오점’이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들의 오점이 되기로.'


그날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증거가 없으면 사실도 없다."

팀장의 거짓말을 들은 날부터 본능처럼 녹음 버튼을 눌렀다. 혹시 몰라서였지만 결국 그건 내 유일한 방패가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과거 팀장과 주고받은 메일과 문자, 그 속에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인사담당자와 면담도 요청해 객관적인 녹취를 만들었다.

어느 정도 증거가 모이자 관할 지역 고용노동부를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곳에서 얻은 건 싸늘한 안내 한 마디뿐이었다.


“온라인으로 신고하세요.”


평소라면 무덤덤하게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서운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공감이나 위로의 말을 기대했던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환승 통로에 설치된 전신거울 속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끔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초췌하고 낯설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너무 창피해서 복도 한구석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상처는 익숙했지만, 바보 취급은 참을 수 없었다.


다음 날 회사로 돌아가 인사담당자에게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으며 수개월째 우울증 치료 중이라고 밝혔다. 인사담당자는 크게 당황하며 내부적으로 보고하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속으로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다짐했지만 도둑질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다음 날 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그렇게 힘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순간 헛웃음이 나왔고 또 한 번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흘렀다.

적어도 그 인간 앞에서는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본부장은 일주일의 질병휴가를 권했다. 하지만 인사팀은 내가 그동안 치료받았던 동네 병원의 진단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상급종합병원의 진단서를 요구했다.

초진조차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대학병원 정신과 진단서를 단기간에 받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뭔가 이상할 정도로 운이 따라주기 시작했다.

예약이 꽉 찬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무작정 찾아갔는데 기존 환자의 예약 취소로 바로 초진을 받을 수 있었고 다음 날 심리검사까지 진행했다.

결국 2주 만에 대학병원의 진단서를 받았다.

그렇게 받아든 진단서의 병명은 F41.2 ‘혼합형 우울장애’였다.

진료를 몇 번 더 받고 나서야 담당 교수는 조심스럽게 폐쇄병동 입원을 권유했다.

겁이 났다, 거기 들어가면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회사와의 싸움에서 밀릴 수 없었다.


챕터7을 마치며...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는 과정이 막막한 분들께 신고 절차에 대해 아래에 정리해두었으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과정 상세 가이드]


1.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와 신고 가능 여부 확인

먼저 자신이 겪은 일이 법적 제도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확인한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예시): 업무 배제, 과도한 업무 부여, 모욕적 언행, 부당한 지시, 차별적 처우 등


신고 전 체크리스트

(1) 가해자의 지위가 피해자보다 높거나 업무상 영향력이 있는가?

(2) 괴롭힘이 반복적으로 이뤄졌거나 장기적인가?

(3) 괴롭힘으로 인해 업무환경이 악화됐거나 정신적·신체적 피해가 명확한가?


2. 증거 수집하기

신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명확하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

증거는 구체적일수록 좋고 감정적 호소보다 사실적 증거가 중요.


중요 증거 자료

(1) 녹취록 (스마트폰으로 쉽게 가능, 당사자가 참여한 녹음은 불법 아님)

(2) 이메일 및 문자 메시지 기록 (지시나 괴롭힘 상황이 명확히 드러난 것)

(3) 동료의 진술서나 목격자 증언

(4) 업무배제나 부당한 인사발령이 확인되는 공식 서류

(5) 병원 진단서 및 치료 기록 (우울증, 불안장애 등 정신적 피해 증빙 가능)


증거 수집시 주의사항

녹취할 때는 날짜, 시간, 장소 등을 정확히 기록

업무와 관련된 공식적인 메일은 모두 보관하고 별도 파일로 정리

진술서를 받을 때는 정확한 사실만 간결하게 작성하도록 요청


3. 회사 내 공식 신고 절차 따르기

우선적으로 회사 내부에서 공식 신고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

▶ 신고 접수처
대부분 회사 내 인사팀, 감사팀, 또는 고충상담실이 존재함.


▶ 신고 방법 (회사 내부 신고 예시)

(1) 신고 내용과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문서 작성 (육하원칙 기반)

(2) 인사팀이나 고충상담 부서에 서면 혹은 이메일로 제출

(3) 신고 접수 사실과 조사 일정 등에 대해 공식 답변 요청 (이메일이나 문서로 받기)


▶ 유의점
내부 신고를 하면서도 반드시 자료는 별도 보관 (이후 외부 신고 때 필수적)


4. 외부 기관에 신고하기

회사가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외부 기관에 추가 신고 진행.


※ 신고 가능한 외부 기관

고용노동부 (지방 관할 노동지청)

국민신문고 (온라인 민원 신청)


※ 외부 신고 절차

(1) 고용노동부 민원신청 페이지에 접속

(2) 공인인증서로 로그인 후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카테고리 선택

(3) 신고 내용 입력 (최대한 구체적·간결하게)

(4) 증거 자료 첨부 (녹취록, 진술서, 이메일 등)

(5) 신고 후 관할 근로감독관 연락 및 조사 일정 통보받기


※ 고용노동부 신고 시 주의할 점

(1) 고용노동부는 신고 사실을 회사에 알려 조사를 진행하므로, 회사 내 압박이나 보복 가능성에 대비가 필요.

(2) 보복이나 불이익이 발생하면 추가로 근로기준법 위반(불이익 처우 금지)으로 신고 가능.


5. 신고 후 대응 및 주의사항

(1) 신고 이후 회사가 문제 해결 대신 보복 조치를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계속해서 기록과 증거를 수집

(2) 만약 보복이나 추가적인 괴롭힘이 발생하면 즉시 근로감독관에게 알리고 추가 신고를 진행

(3) 정신적 피해가 심하다면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기록을 남길 것 (산업재해 신청 시 필수 증빙자료가 됨)


6. 법적 절차로 갈 경우

(1) 회사가 끝내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가 지속된다면, 법적 절차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노동위원회 구제신청 등)를 검토할 수 있음.

(2) 노무사나 변호사의 자문을 반드시 받을 것

(3) 고용노동부 신고와 별개로 민사소송(정신적 피해 보상 청구) 을 할 수 있고, 노동위원회에 부당 전직, 부당 해고 구제 신청 가능


[※ 가장 많이 하는 실수 및 주의사항]

▶ 많이 하는 실수 :

- 감정적 대응

- 신고 사실을 미리 회사에 알림

- 증거 없이 말로만 신고


▶ 올바른 대응법 :

- 철저히 냉정하고 객관적인 기록과 증거를 중심으로 대응

- 증거 수집 후 공식적으로 조용히 신고

- 증거는 필수, 증거가 없으면 사실도 없다고 간주


[※ 성공 확률을 높이는 꿀팁 ]

(1) 피해 사실이 있을 때마다 즉각 기록 (일자, 시간, 장소 명확히)

(2) 동료나 상사와의 모든 대화를 녹음하는 습관 가지기

(3) 회사 내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이메일 등 문서화

(4) 회사 내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연대 (필요시 증언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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