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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 대신 이메일을 보냈다.

챕터 8

by But Tier

며칠 후,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전화가 왔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정식으로 접수됐고 회사 인사팀에 해당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공문을 보낼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이 직원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입니까?”

그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사실 확인은 필요하겠지만 과연 회사가 "네, 맞습니다. 우리가 괴롭혔어요."라고 인정할 리가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 인사팀 담당자가 조용히 고충상담실로 불렀다.


“고용노동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부장님이 원하시는 게 정확히 뭡니까?”


나는 대답 대신 질문했다.

“인사팀장은 안 나오고 뭡니까? 회사에서 부장급 문제를 논의하는데 인사팀장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요?”


담당자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였다. 인사팀장은 예전부터 본부장과 같은 부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회사 규정대로 괴롭힘에 대한 정확한 사실 조사와 공식 사과 그리고 전사적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서 공지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퇴사하겠습니다. 다만, 그냥 나가진 않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겪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주세요. 그게 어렵다면,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담당자는 잠시 침묵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근데 부장님, 이거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각오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사팀이 이 사건을 어떻게든 조용히 덮으려 한다는 기류가 느껴졌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부적으로 공론화되려면 윗선이 반드시 알아야 했다.

그날 밤, 조용한 거실에서 대표이사에게 이메일을 썼다. 그동안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나에게 어떤 괴롭힘이 있었는지 담담하게 적었다. 분노 대신 진심을, 억울함 대신 사실을 썼다.

며칠간 연차를 내고 집에서 쉬던 중 인사팀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구하신 내용 회사에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출근하지 마시고 근처에서 뵙죠.”


“기억하라. 이건 퇴사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다음 날 회사 근처 카페에서 담당자를 만났다. 그들의 제안은 간단했다.

내 퇴사를 조건으로 1년 치 연봉을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사실 조사와 그 결과를 전 직원에게 공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고용노동부에 신고한 내용은 취하해달라고 했다.

짧지 않은 대화 끝에 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가 가지고 온 퇴직 합의서에 서명했고 그 안엔 앞으로 민·형사상 어떠한 소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단, 산재 신청만큼은 계속 진행할 거라고 말하자 인사담당자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건 알아서 하세요.


그 짧은 말에는 명확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게 되기나 하겠어?’라는 비아냥이 들리는 듯했다.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쯤 되면 최소한 인사담당 임원이나 아니면 대표이사와의 퇴사 면담쯤은 이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단 한 번도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겐 그런 ‘값’도 안 되는 존재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가끔 후회가 밀려든다. 퇴사하지 말고 조금 더 버텨서 그들에게 진짜 성가신 존재가 되어볼 걸 이라는….


일요일 오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가서 내 짐을 정리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꿔왔던 대기업 사원이라는 명찰을 조용히 반납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1년치 연봉 받고 나왔으면 성공한 복수 아니냐?"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성공도 복수도 아니라 그저 내 방식의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것을.


챕터8을 마치며….

“회사는 정의가 아니다. 버티는 것만으로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가 바로 각성의 순간이다.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기꺼이 수퍼빌런이 되어주자. 그 세계에는 당신을 구해줄 히어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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