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6
7개월 만의 복귀 명령 그리고 예상치 못한 본사 발령이었다.
지점 근무자가 본사로 발령받으면 흔히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본사에는 본부장이 있었고 여전히 나를 견제하던 팀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본사 SCM운영 파트의 파트장으로 발령받았다.
처음 명단을 확인했을 때 내 팀원 수는 무려 10명.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라며 다시 명단을 확인한 순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절반 이상은 타 부서에서 전출된 인원들이었고 그중 일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로 조직 내에서 ‘문제 사원’으로 낙인찍힌 이들이었다.
회사는 문제 직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나를 그들의 책임자로 앉힌 것이었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내 현실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나는 늘 이렇게 다짐해왔다. “누구에게나 잘하는 것 하나쯤은 있다.” 관리자의 능력은 그것을 발견해 활용하는 데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본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개선점과 새로운 제안을 담은 기획서를 밤새워 만들었다.
실적보다 신뢰가 중요했다. 그래서 타 부서를 적극 지원하는 전략을 펼쳤다.
중복되거나 애매한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고 잡무까지 떠맡으며 우리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략은 통했다. 부서장 회의 때마다 우리 파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고 협조 요청도 이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복권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를 견제하는 팀장은 여전히 강력했다.
어느 날, 며칠간 심혈을 기울인 기획서를 보고했지만 그는 건성으로 넘겼다.
“그래, 내가 본부장님께 보고할게.”
“제가 만든 기획안이니 같이 들어가서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내가 보고할 테니 그만 가봐.”
그때 나는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그렇게 또 한 번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이젠 습관이 되어 나를 보호하는 척하며 서서히 나를 삼켜버렸다.
며칠 후, 본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팀장은 기획서의 핵심 내용을 뺀 채 일부만 발췌해 보고했고 본부장은 “이런 걸 기획서라고 가져왔냐”며 핀잔을 줬다는 것이다.
얼마 뒤, 물류본부의 다른 간부와의 대화는 더 큰 충격을 줬다.
팀장은 그동안 내가 자발적으로 휴직을 요청했으며 근로 의지가 부족하다는 허위 보고를 수차례 올렸다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곧장 팀장을 찾아가 따졌다. 그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내가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 밝히자 횡설수설하며 말을 흐렸다.
“그럼 제가 이 건을 인사팀과 감사팀에 정식 보고해도 괜찮겠습니까?”
그제서야 억지로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휴직 내내 마음속을 갉아먹던 질문을 꺼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제가 그렇게 밉던가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순간, 영화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으로 빙의 되어 물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감시하고 기획서를 가로채고 내 말을 왜곡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전생에 내가 그의 일기장이라도 훔쳤던 모양이다.
아니면 전생에 그는 독립군, 나는 일본 순사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곧바로 인사팀 고충처리 담당자를 찾아가 지금까지의 업무 배제, 사실 왜곡, 조직적 괴롭힘을 모두 털어놓았다.
며칠 후 본부장과의 면담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
본부장은 “내가 오해했던 것 같다”며 위로하는 척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조차 연출된 연민에 불과했다.
다음 날, 인사팀 담당자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말한 모든 내용이 사실로 확인됐으며 팀장은 다음 달 퇴사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엠바고를 지켜달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곧 운영팀장으로 발령 날 겁니다.”
그 말 한마디는 지난 1년의 침묵과 눈물 그 모든 시간을 통째로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밤, 스스로를 조금 사랑할 수 있었다.
발령 전날, 타 부서 팀장들이 지나 가면서 미리 축하한다고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속으로 좋으면서 “아유 ~아직 발령 전이라서 몰라요” 했지만 나의 기대치는 최고조에 달했다.
퇴근시간 마음에 맞는 팀원들이 먼저 축하 주 한잔 하자고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나름 여러 멘토를 만났다.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는 분명 멘토였지만, 꼭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아, 나는 저런 인간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어떤 이들은 정말로, “최소한 저 새X처럼은 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되뇌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다짐했다. 나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에게 만큼은 반면교사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좋은 멘토가 되고 싶다고. 그 날밤 그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게 그날 밤 기울인 술잔은 나에게 있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속감, 존재감, 인정, 그리고 잊고 지냈던 자신감을 찾는 기분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몰랐다.
그것이 또다른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조직개편이 발표되었다.
영업팀장이 물류운영팀장으로 보직 변경된 것이다.
순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함과 함께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마치 고급 옷가게에 들어갔을 때 점원이 말했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으시려면 지금 옷과 속옷을 전부 벗고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옷을 벗은 채 안내 받은 방에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둠 뿐이었다.
잠시 후, 불이 켜졌고 나는 알몸으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수많은 관객들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들은 웃느라 눈물을 흘렸고 나는 맨몸으로 그 조롱을 받아내고 있었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사무실 모든 직원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모니터에 떠 있는 조직개편 명단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 조직개편에는 내 승진 말고도 또 하나의 모욕이 있었다.
사내 성희롱으로 징계를 받은 물류본부 간부 한 명이, 부장에서 과장으로 강등된 뒤 내 팀원으로 발령된 것이다.
그는 본부장의 충성스러운 측근이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업무 방식까지 나와는 정반대였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장 경계하고 혐오하던 부류였다. 이제 그런 그가, 내 지시를 받아야 할 위치에 왔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난 파트장이 아니라 갱생센터 센터장쯤 되는 셈이다.
조직개편 발표 직후 본부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승진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그 강등된 직원을 언급하며 한마디만 남겼다.
“잘 좀 데리고 일해봐.”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더 이상 참지 않기로 내 자리를 내놓고서라도 이제는 싸우기로.
챕터6을 마치며…
“이제부터는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산재를 신청해 승인받기까지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려 합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