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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증명해야 했다.

챕터 10

by But Tier

B그룹을 다니는 동안 나는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꾸준히 통원치료와 상담을 받아왔다. 퇴사 직전에는 그곳에서 산업재해 신청에 필요한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를 미리 받아 두기도 했다.

이후 스타트업 C사에 바로 취업하면서 산재신청은 잠시 미뤄두었지만 이제 퇴사한 지금은 더는 미룰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근로복지공단에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참고로, 소견서에 기재된 최초 재해일 기준으로 3년 이내에 산재를 신청해야 한다. 즉, 퇴사 이후에도 신청은 가능하다.

글 말미에 신청 절차를 따로 정리해두었으니 필요한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산재 신청은 절차만 보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재해발생 경위서를 얼마나 사실에 입각해 설득력 있게 써 내려가고 그것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는 것이었다.

정신질환은 외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려면 더욱 섬세하고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내 경우, 만약 고용노동부나 B그룹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문서라도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퇴사 당시, 일정 금액의 위로금을 받는 조건으로 고용노동부 진정을 자진 취하했고 인사팀이 약속했던 내부 조사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회사와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일은 오롯이 나 혼자의 몫이었다.


나는 먼저 재해발생 경위서를 쓰기 시작했다. 수차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최대한 사실에 기반해 차분하게 정리하려 노력했다. 육하원칙에 따라 시기, 장소, 상황, 그리고 당시 분위기까지 담아내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객관적 증거들도 함께 정리해나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자료는 내가 그동안 기록해둔 녹취 파일이었다. 이는 정신질환 산재신청에서 가장 객관적이자 유일한 유효 증거 자료였다. 하지만 산재 신청 시 이를 증거로 제출하려면 전문업체를 통해 녹취록으로 작성해야 했다. 속기사나 행정사, 녹취사 등에 맡기면 10분당 5~7만 원, 1시간 분량이면 20~30만 원 이상이 들었다. 그 많은 분량을 모두 맡기기엔 백수인 내게 너무 큰 부담이었다. 결국 나는 직접 타이핑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냥 ‘들리는 대로 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전혀 쉽지 않았다.

녹취를 들을 때마다 그날의 분노, 억울함, 무력감이 되살아나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잠시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예전의 내 목소리, 내 항변, 내 눈물.

‘나는 왜 이 말들을 증거로 남겨야 했을까.’
눈을 떴을 때,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감정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나는 또 한 줄을 적었다.

그렇게 몇 번을 멈췄고 또 몇 번을 울며, 녹취록을 써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이제 그만해. 이거 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백수인 지금,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았고 게다가 나에게 있어 이 녹취록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이자나를 지키는 마지막 무기였다.

그렇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하루 10시간씩 녹취를 듣고 직접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했다. 며칠을 반복하자 A4 기준으로 30장이 넘는 분량이 나왔다.

담당자가 이 모든 걸 다 읽진 않을 것 같아 핵심적인 내용은 형광색으로 강조했고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대화에는 별도 표시를 더했다.

이제 제출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산재 신청서, 의사 소견서, 재해경위서, 그리고 녹취록 요약본 그리고 녹취파일을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퇴사 후에도 우울증 치료는 계속 이어졌다. 한 달에 두 번, 2년 넘게 동네 정신과에서 진료와 상담을 받았다. 진료 시간은 짧았고 의사 선생님은 다소 무뚝뚝했지만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

그러던 C사를 퇴사하던 날, 퇴근길에 병원을 찾았다. 상담 도중 나는 담담히 말했다.


“오늘 회사를 그만뒀어요. 믿었던 사람한테 너무 큰 배신감을 느껴서 화가 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짜증을 내듯 쏘아붙였다.


“그러게 치료나 받지, 뭘 하러 재취업을 하셨어요? 제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셔서 그런 거잖아요.”


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마치 화풀이하듯 내뱉는 말투에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상처받아 이곳에 온 사람에게 선생님마저 상처를 주시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제야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그 말이 내가 2년 넘게 다니던 병원에서의 마지막 진료였다.

병원을 나오는 길,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의사도 사람이니까 피곤했겠지, 오늘따라 환자들에게 너무 지쳤거나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밤 ‘정신과에서도 외면받았다’는 생각이 내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나는 스스로를 ‘정신과 의사조차 포기한 놈’처럼 느끼기 시작했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전부 내 잘못인 것처럼 여겨지며 혼자 주저앉았다.

그 감정은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순간 알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걸.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섰다.

다음 날 우리 시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는 단일 규모로 가장 크다는 병원을 찾아갔다. 원무과에서 내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친절하고 평이 좋은 선생님으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병원을 예약했고 나를 살리기 위한 다음 단계를 시작했다.

몸을 먼저 회복해보자고 다짐했다. 과거에도 몇 번 헬스장 회원권을 끊은 적은 있었지만 한 달 이상 다닌 적은 없었다. 이번엔 달랐다. 살기 위해 운동했다.

PT까지 등록했고 일주일에 4~5번씩 하루 1시간 반씩 헬스장에 나갔다. 땀 흘리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몸이 바뀌자 마음도 아주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다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챕터10을 마치며...

"정신질환 산재신청 절차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두었으니, 필요한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정신질환 산업재해 신청 가이드]

직장 내 괴롭힘 등 업무 관련 정신적 손상 중심

1. 신청 요건 확인

질환 종류 : 우울증, 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적응장애 등

발생 원인 : 직장 내 괴롭힘,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폭언·욕설·따돌림, 부당한 인사조치 등

입증 요건 : 업무와 정신질환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 필요


2. 산재 신청 가능 기한

의사의 **산재 관련 소견서(요양급여신청용)**에 기재된 ‘최초 재해일’ 기준 3년 이내

퇴사 후에도 신청 가능


3. 필수 서류 준비

1) 요양급여신청서 (근로자가 작성)

2)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작성)

3) 재해발생 경위서 (본인이 직접 작성)

4) 진료기록 사본 (가능한 처음 내원일부터 진단명, 치료 내용 포함)

5) 증빙자료

-녹취록, 문자, 이메일, 메신저 캡처

-병가 내역, 상담 내역, 회사 내 인사이동 기록

-동료 진술서(가능하면)

6) 기타

-퇴직 관련 자료 (명예퇴직, 해고, 사직서 등)


4. 재해발생 경위서 작성 팁

▶ 육하원칙에 따라 정리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감정 표현보다는 사실 위주로 구체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

심리적·신체적 반응 포함 (불면, 식욕저하, 공황 증상 등)


5. 증거 확보 전략

▶ 녹취파일 → 가능한 한 타이핑해 녹취록으로 제출

▶ 메신저 캡처 → 날짜, 이름, 내용 잘 보이도록

▶ 메일 기록 → 괴롭힘 내용이 포함된 공식 커뮤니케이션

▶ 일기/기록장 → 지속적으로 작성한 경우 참고 자료 가능


6. 신청 방법

온라인 신청 (가장 편리)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www.kcomwel.or.kr)


민원 → 요양신청 → 공인인증서 로그인 후 첨부서류 업로드


방문 신청

관할 근로복지공단 지사 방문


서류 제출 후 서면심사 및 조사 진행



7. 심사 및 결과 통지

심사 기간 : 보통 2~3개월 (복잡한 경우 6개월 이상도 가능)

보완 요청 : 서류 미비 시 추가 제출 요청 가능

결과 통보 : 등기우편 및 문자로 통보됨


8. 산재 승인 시 혜택

▶ 요양급여: 치료비 전액 지원

▶ 휴업급여: 치료 기간 중 월급의 약 70% 지급

▶ 장해급여: 완치 후에도 장애 남으면 추가 보상

▶ 복귀 후 직무 변경, 재활 지원 등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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