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1
산업재해 신청서를 제출하고 약 보름쯤 지났을 무렵 근로복지공단 담당자에게서 첫 전화가 걸려왔다. 접수는 잘 되었고 이제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조사를 시작한 뒤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갈 거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담당자의 전화가 왔다. 내가 제출한 ‘재해발생경위서’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공단 측에서 B그룹 인사팀에 공식적인 질의서를 보냈고 그에 대한 회신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회신 내용은 내 주장을 전면 반박하는 문서였고 공단은 그 반박문서를 나에게 이메일로 전달하며 선택지를 제시했다. 검토 후 이대로 사측의 주장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재반박할지를 양식에 맞춰 제출해달라고 했다.
메일 제목은 평범했다. [사건번호: 서울2022-XXXXXX 관련 회신] 하지만 클릭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끝이 저릿했고 클릭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판결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메일을 열자 B그룹 인사팀에서 작성한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문서를 읽다 말고 숨을 잠시 골랐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이건 반박이 아니라 조롱이잖아...’
눈앞이 흐려지고 손끝이 떨렸다.
내용은 내가 주장한 재해 발생 경위 전반에 대한 반박이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띄는 건,구체적인 증거나 사실관계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냥 초등학생 일기처럼 “그런 일 없었어요”라는 부정뿐이었다.
그 문서에 따르면 나는 ‘강제 휴직도, 업무 배제도 당하지 않았고 직장 내 괴롭힘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리더십 부족, 나쁜 평판, 근무 태만’의 삼중콤보를 지닌 회사에 해악을 끼친 인물처럼 묘사돼 있었다.
마치, 슈퍼빌런이라도 되는 듯이…
그중 특히 어이없었던 건 근무태도 불량의 ‘증거’로 든 내용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바쁜 와중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휴식하는 등 신청인은 근무태만 하는 업무형태를 보였다.’
이건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맥락이 달랐다.
당시 나는 새 지점 오픈 준비로 밤을 새던 날이었다. 지하 3층의 세팅되지 않은 창고 사무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잠시 책상에 발을 올려 쉬었다. 야근수당도 없이 그야말로 나를 갈아 넣던 날이었다.
내 기억에 책상에 발을 올린 날은 그날 단 하루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아니, 그걸 누가 봤지? 몇 년 전 CCTV라도 돌려본 건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약점 하나 잡지 못해 먼지 털듯 뒤진 끝에 그런 걸 끄집어낸 걸 보면 오히려 내 성실함을 증명하는 반증 같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이 어이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지만 동시에 참담했다.
나는 왜 저런 회사를 위해 밤새워 일했을까?
왜 없던 사실은 꾸며내고, 있던 일은 부정하는 걸까?
이 문서를 쓴 사람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쓴 걸까?
우울감이 짙은 먹구름처럼 순간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바로 약을 복용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차분히 그들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팩트만으로 짧고 명확하게 반박했다.
감정은 지웠다. 논리만 남겼다.
그렇게 작성한 반박서를 정해진 기한 내에 공단에 제출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공단의 연락을 받았다. 주로 제출한 자료에 대한 보완 요청이었고, 그중 하나는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최근 10년간 진료기록을 제출하라는 요청도 받았다. 내가 주장하는 우울증이 입사 전부터 있었던 기저 질환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제는 기다림만이 남았다.
질병판정위원회의 결정을 앞두고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아침이면 메일함을 열었다. 혹시라도 도착했을까 싶어 하루에 수차례 메일을 확인했다. 매일, 마음속에서 ‘오늘일까?’라는 물음이 생겼다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몇 달이 흘렀고 드디어 이메일로 ‘업무상질병 판정서’가 도착했다.
사건번호: 서울2022-xxxxxxx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내 심장은 요동쳤다. 한 줄, 한 줄. 마치 내 삶을 다시 써주는 글귀 같았다.
“동료 인력 감축, 상사와의 갈등, 전배 요청 거절, 휴직 강요 등 상기 업무적인 부담이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부담을 상회한다.
...(중략)...
따라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
마지막 줄에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이제 됐어.”
스스로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수없이 흔들리고 부서졌던 날들의 잔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의 마지막 문장이 또렷하게 보였다.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부담을 상회한다”는 그 말은 마치 누군가 내 귓가에 직접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국가가 나의 상처를, 나의 눈물을, 그리고 나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건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내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은 최초의 공식 인증서이자,
‘당신 잘못이 아니었다’는 늦게 도착한 위로의 편지였다.
챕터11을 마치며...
"사람들은 병이 낫는 걸 회복이라 부르지만 나는 진실을 얻는 걸 회복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