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2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다음 날, 마음은 이상할 만큼 덤덤했다.
그토록 진실을 밝히겠다고, 회사와 싸워 이기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통쾌함은커녕 이상하리만치 공허했다.
마치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나중에 진짜 범인이 잡혀 풀려난 기분. 분명 나는 무죄였지만 누구 하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해는 풀렸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그 사건으로 기억했다.
정신질환 산재 승인은 내게 ‘명예회복’이 아니라 그저 억울함의 공식적인 확인서 한 장에 불과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고 삶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산재 승인을 받은 날, 가족도 친구도 말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이 낯설게 들렸다.
뭐가 다행이지?
직장도 잃고, 마음을 잃고, 자신감도 잃은 이 삶이?
산재 승인 이후의 삶은 ‘회복’이라기보다 ‘버팀’이었다. 버티다 보면 좋아질 거라 믿었다..
헬스장, 병원, 재취업 활동….그게 내 일상이었다.
운동을 하면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고 땀을 흘린 날에는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2주에 한 번씩 정신과를 찾았다.
주치의 선생님은 30분씩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셨다.
하지 않은 말까지 끌어내듯 물어봐 주셨고 병원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건 마치 2주마다 하는 고해성사 같았다.
“당신은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거예요.”
선생님의 말이었다.
정확했다.
그래서 나는 재취업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산재승인으로 공단에서 휴업급여가 나오고 있었기에 당장 생계가 급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3개월마다 갱신되는 불안정한 생명줄이었다.
3개월 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작성한 진료계획서를 공단에 제출하고 내부 심사를 거쳐야만 급여가 지급됐다.
심사 결과가 불승인이면 그 순간부터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신청서를 제출할 때마다 그 한 달 전부터 극심한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이번엔 끊기면 어쩌지?”
나는 매번 3개월짜리 연장선에 목숨을 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산재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솔직히 말해, 두 곳의 대기업 경력에 관련 국가자격증도 다섯 개나 있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재취업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 1년 차, 채용은 멈췄고 경제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이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선사, 글로벌 물류기업 등 다양한 곳에 지원했고 운 좋게 면접까지 갔지만 당시 코로나로 인해 모두 면접은 화상 인터뷰로 진행이 되었고 (나는 대면 인터뷰에 익숙했지만 화상 인터뷰는 생소 했다.) 외국계 특성상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영어로 진행됐다.
10년 전만 해도 영어 면접쯤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B그룹에서는 영어를 거의 쓸 일이 없었고 실력은 서서히 녹슬어 있었다.
해결 방법은 분명했다.
부족해진 실력을 다시 끌어올리기만 하면 됐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강남의 영어회화 수업까지 등록해 주4일을 빠짐없이 반년을 다녔다. 학원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젊은 수강생들 틈에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발음도, 말하기 속도도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엔 예상 질문을 반복해 연습했다. 정말 오랜만에, ‘공부’라는 걸 열심히 해봤다. 그만큼 절박했고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반복됐다.
최종 면접까지 통과하고도 매번 탈락 통보를 받았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결국 나는 조심스레 추론했다.
첫 번째 가능성.
나보다 더 적합한 후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건 당연히 반박의 여지가 없다.
두 번째 가능성.
내가 지원한 대부분의 자리는 최소 부장급 이상의 관리직이었고 그 단계에선 전 직장 평판 조회가 기본이라는 점. 그리고 B그룹 인사팀이 나에 대해 좋게 얘기했을 리 없다는 점.
설사 그들이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했다고 해도,
“정신질환으로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라는 말 한마디가 채용 담당자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산재 승인’이란 증명서를 손에 쥐었지만 현실에서는 낙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수십 번의 면접에서 탈락했고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그 문조차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내 경력에 맞는 자리가 있다면 거리가 얼마나 멀든 상관없이 이력서를 넣었다.
물론 대부분의 채용 요건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였다. 나이 제한에 걸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경력과 실력이면 면접 기회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그렇게 1년.
다시 일어서기 위한 마음으로 매번 새롭게 다듬어 보낸 100통의 이력서.
세상은 그 100번 모두, 조용히 말해줬다.
“당신이 설 자리는, 여기 없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증명은 끝났지만
기대했던 회복은 어디에도 없었다.
챕터12를 마치며…
"국가는 나의 상처를 ‘산재’로 인정해줬지만 사회는 그것을 ‘낙인’으로 되돌려줬다.
법적으로는 보호받았지만 세상은 조용히 사라지길 바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구제된 동시에 고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