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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보다 못한 병.

챕터 13

by But Tier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코로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마스크를 슬슬 벗기 시작했고 일상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아지진 않았지만 익숙해졌다.

채용 불합격에, 서류 탈락에, 길어지는 공백에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우울증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심각하게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나아지지도 않았다.

가끔은 감정이 폭주했다.

나도 모르게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했고 그 순간마다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자책감에 병원을 찾아가 자발적 입원을 요청했지만 내가 들어갈 병상은 없었고 주치의 선생님도 입원까지는 권유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말한다.

“우울증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병이에요. 나아졌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그 반복 속에서 점점 무뎌지는 거죠.”


그 말처럼 내 증상도 들쭉날쭉했다.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금세 바닥까지 추락하곤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는 마치 내가 안고 있는 우울감과 죄책감이 형체를 얻은 듯

땅바닥을 질질 끌리듯 따라왔다.


“제발 꺼져”



“배려 말고 돌봄”


우울증은 절대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병이다. 그래서 가족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일수록 가족은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기복은 극단적으로 요동쳤고 나는 때때로 아무것도 아닌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문장 속 틀린 띄어쓰기를 찾아내듯 가족의 무심코 던진 말에서 스스로 상처받을 구석을 찾아냈다. 그리고 화를 내고, 상처를 주고, 또다시 스스로를 미워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가족들도 지칠 만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 조심해야 하는 매일.

별것 아닌 말에도 쉽게 화내고 무너지는 내가 싫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지친 표정을 마주할 때면 나조차 나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쉽게 말하곤 한다.

“우울증 환자는 배려해줘야죠.”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가족 중에 심한 감기 환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배려하는가? 아니다. ‘돌본다’. 밥을 챙기고, 약을 먹이고, 체온을 확인한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돌봄이다.

배려는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고 회사에서 휴가 일정을 먼저 잡도록 양해하는 것이다.

가족 안의 환자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케어의 대상이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다. 내 주변만 봐도 그저 일시적인 기분 저하이거나 정신력이 약해서 생긴 문제쯤으로 여긴다. 사실, 나 역시 이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쉽게 무시당하고 더 가볍게 치부된다.

감기보다 못한 취급.

그게 우울증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완치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저 귀찮고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병.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가족조차도 쉽게 지나친다.

나는, 그런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병으로 내 가족도 함께 아프고 있다.

이제는 알겠다. 우울증은 내 혼자만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병은 배려가 아니라 돌봄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PTSD”


그렇게 산재 치료를 받는 동안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솔직히 정치에는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중 한 후보의 말투, 표정, 사람을 대하는 태도…모든 것이 B그룹 본부장을 떠올리게 했다.

"TV에 그가 나올 때마다, 나는 다시 그 회의실 구석에 내몰린 듯 숨이 턱 막히고 속이 뒤틀렸다. 그때 처음으로 PTSD라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그가 당선되던 날,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왜 저런 부류의 사람들은 거침없이 올라갈까.

왜 사람들은 저런 인간을 따르고 응원할까.

그의 행동 속에 분명한 폭력성과 오만이 보였지만 그걸 보는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싶었다.

정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혼란스러웠다.

정말, 모르겠다
그 이후 당분간 나는, 세상과 단절된 감정에 갇혀서 지냈다.



“가장 오래된 슬픔과 마주하다”


산재 환자로 인정받고 나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심리상담이었다. 병원에서의 진단이나 약 처방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상담이었다.

그 중 한 번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최면 상담이었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내 안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처음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었다.


상담사: “천천히 숨을 쉬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보세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나: “...작고 어두운 방이에요. 어린 제가 구석에 웅크려 울고 있어요.”


상담사: “무엇 때문에 울고 있죠?”


다섯 살쯤이었을까... 두 살 위 형은 태권도 학원에 다녔는데 나는 늘 그게 부러웠다.

특히 하얀 도복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나도 다니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결국 태권도 학원에 가지 못한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작고 어린 마음은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배웠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는 보이스카우트를 중학교 때는 아람단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 갈망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마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작은 흠집처럼, 조용히, 그리고 오래도록 나를 울렸다.


어린시절 굶주리진 않았지만 우리는 가난한 편이였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고 어머니는 늘 장사로 바빴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 형제는 외할머니 집에 ‘얹혀’ 살았고 조금 더 커서는 외삼촌 집으로 옮겨 살았다.

고등학교 때는 형과 단둘이,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반지하 셋방에서 살았다.

형과는 매일 싸웠고 집은 늘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집에 얹혀 지내는 아이’로 자랐다.

친척들에게 나는 말썽꾸러기이고, 예민하고, 귀찮은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환영받지도 인정받지 못한 채 자란 시간들.

심리상담사는 그때의 외로움과 결핍이 내 정서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왜 나는 감정이 자주 무너지는지, 왜 상처에 그렇게 민감한지, 왜 항상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났었는지.

그리고 요즘 자주, 아주 오래전 일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어린시절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몰래 훔치거나 할아버지 지갑에서 천원씩 몰래 가져간 일들이 죄처럼 떠오른다.

그 동안의 크고 작은 죄가 겹겹이 쌓여 반백살인 지금,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무력감과 슬픔으로 벌을 받나 싶다.

나는 또 나를 심판하기 시작한다.

늘 그래왔듯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그냥 무너지는 건, 정말 죽는 것보다 싫었다.

누군가 말했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하고 싶다’는 감정조차 없다”고.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 여행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무엇보다,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

'그래, 언제는 편했던 적 있었나? 그리워할 과거는 없어서 다행이네'

'이 또한 끝이 있겠지. 조금만 더, 버텨보자.'

'인생이라면….이 정도의 서사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국가가 허락한 2년의 시간을 버티며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어느 날, 산재요양의 끝은 집으로 도착한 한 장의 통지서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요양 종결 그리고 후유장해 14등급’


그것은 내가 감당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고통의 숫자였고

국가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위로였다.

‘종결’이라는 말 앞에서 모든 지원도 보호도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것을.

세상이 나를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나는 나 자신만큼은 절대 놓지 않으려 한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But Ti Go 있다."



챕터13을 마치며….

"산재가 종결된 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결국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내 등을 밀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후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과 위로금을 모아 북카페를 창업했다.


나는 여전히 힘들다.

창업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고 외로운 싸움일 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만약 다음 이야기를 쓴다면,

아마도 북카페를 열고 운영하며 마주했던 현실적인 고난과 그 안에서 작게나마 피어나는 희망에 대해서일 것이다.


인생은 언제나 나를 예상하지 못한 길로 데려다놓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 앞에 놓인 그 길 위에서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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