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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는 사람.

챕터 9

by But Tier

B그룹을 퇴사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A그룹 시절 함께 일했던 후배의 소개로 스타트업 C사에 이사 직급으로 입사하게 됐다.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명함도 그럴듯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납품, 배달, 영업, 고객 관리까지. 온갖 실무를 나 혼자 도맡아야 했다.
스타트업이니만큼 직접 부딪히며 전 과정을 경험하는 건 오히려 반가웠다. 마치 10년은 젊어진 기분이랄까.

하지만 회사 분위기는 첫날부터 낯설었다.

아침에 출근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 슬쩍 일어나보니 사무실엔 나 혼자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거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처음엔 그렇게 넘겼지만 퇴사할 때까지 점심은 늘 혼자였다. 식당에서도 거리에서도 늘 혼자였다.


며칠이 지나자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동 대표 중 한 명은 50대 나머지 한 명은 30대였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나이 많은 대표의 지인들이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은 나온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솔직히 같은 사무실에 있었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회사 일은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 적응할 순 없었지만 젊은 대표를 믿고 내가 맡은 일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입사 초기, 종합병원 대상으로 의약품 납품을 맡았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성과를 내보려 노력했다.

영업부터 물류, 계약서 검토까지 모두 나 혼자 해냈다.
회사에서 추진 중이던 복제약 수입 관련 프로세스도 내가 직접 기획하고 구축해 나갔다.
정말 내 일처럼, 내 회사처럼 일했다.

하지만 입사 3개월 만에 사건이 터졌다.
나이 많은 대표가 투자금을 마치 자기 쌈짓돈처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투자처는 자금 회수를 통보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데려온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떠났고 조직은 사실상 붕괴 직전 상태가 됐다.

급한 마음에 A그룹 시절 함께했던 후배에게 연락했다. 마침 퇴사 후 새 회사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솔직히 이 회사가 좋은지 나쁜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대표의 계획만 제대로 굴러가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받을 수 있을 거야.”


“밥을 지으려면 쌀도 씻고 솥도 닦아야 해. 고슬고슬한 밥이 될지, 탄 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밥을 너랑 나누고 싶어서 부른 거야.” (나는 평소에도 비유를 자주 쓰는 편이다.)


하지만 회사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입사한 후배 역시 주어진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팀워크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실망 끝에 회사를 떠나야 했다.

퇴사를 앞두고 나를 이 회사에 소개했던 후배가 말했다.


“형, 그렇게 일한다고 누가 알아줘요? 형은 진짜 자기 사업 하셔야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났다.
처음엔 나를 ‘모셔가야 한다’며 함께 회사를 키우자고 했던 그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정말 내 일처럼 뛰니까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 회사엔 ‘기회’ 따위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나한테도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랬다면 나도 대충 눈치만 보며 월급 루팡이나하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젊은 대표가 공급처와 대금 정산 문제로 마찰을 빚었고 결국 납품 중단 통보를 받았다.
당시 회사에서 유일하게 매출이 발생하던 업무였기에 나는 직접 공급처 담당자를 찾아갔다.
무릎만 꿇지 않았지 정말 사정 사정을 해서 공급 중단은 철회됐고, 거래는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내게 젊은 대표가 건넨 말은 단 한마디였다.


“아, 네. 수고하셨네요.”


그게 끝이었다. 그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똥은 대표가 싸고 수습은 내가 했는데, 고마움도 없고 미안함도 없었다.
그는 아마 그 매출이 혹은 이 회사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나만 미친놈처럼 뛰어다녔던 걸까.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젊었고 아마도 나만 몰랐던 다른 계획이 이미 있었던 것 같다.
이 회사는 그들에게 수많은 기회 중 하나였고,
윷놀이에서 ‘빽도’가 나와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젊음과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시간도, 체력도, 기회도 많지 않은 쉰을 앞둔 중년이었다.
그래서 이 한 번의 기회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대기업 B사 퇴사 30일 만에 입사한 스타트업에서 5개월 만에 퇴사했고,
그 회사는 1년 뒤 폐업했다.

연이은 퇴사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B그룹 퇴사 후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충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일에 매달렸고 결국 다시 무너졌다.

이쯤 되니 문제는 회사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는 잠시 멈추자. 회복이 먼저다.


그리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산업재해 신청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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