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8일
행복한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난다. 친구와 웃고 떠들거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연인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에 치여 바쁜 사람, 건강한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고 운동을 하는 사람도 밉다. 무엇보다 가장 미운 건 내 곁에 있는 사람, 있던 사람, 장난기어린 내 투정에 미안하다며 변명하는 사람, 어느 날엔가 무심히 연락 보내는 친구다. 그들에게 내가 느끼는 미운 감정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또 책임을 전가하는 일인지 안다. 결국 그래서는 모두가 떠나는 결말을 맞이하고야 나는 만족할 것이다. 아니, 그러고도 나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보다야 조금 더 나을 순 있다 해도.
결국, 나는 죽지 않았다.
이제는 좀처럼 꿈에서 할머니를 볼 수 없다. 밤은 다시 내가 오래 전부터 그래온 것처럼 죽음이나 영혼의 예습 따위 없는 검은 찰나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꿈은 서서히, 때로는 뒷걸음질치기도 하였으나 결국엔 한 발짝씩 분명하게 나의 하루 속으로 들어왔다. 깨어 있는 동안 나는 자주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 때로는 추억의 방으로, 때로는 미래의 길거리로, 가능하리라 믿었던 조금 더 나은 세계로. 이제 순옥은 내가 자는 동안이 아니라,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 나타난다. 그순간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리게 되는 건 왜일까. 누가 나에게 돌아가라고, 다시 돌아오라고 두드리는 걸까? 그 손님의 바람을 나는 이뤄주지 못했다. 어째서 살아야 하지?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한 지는 오래 되었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몽유병 세계의 시민이 되고부터 좀 더 잘 볼 수 있게 된 것은 도처에 깔린 슬픔이다. 세계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숫한 사자死者가 산 자의 입말을 통해 아주 잠깐 꿈의 세계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되돌아간다.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는 저 깊은 꿈 속으로, 돌아간다. 누가 누구를 가두는 것일까. 산 자가 죽은 자를 가두고 있는지, 죽은 자가 산 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죄를 씌울 몸이 없는 데 반해, 산 자는 몸이 있다. 무엇보다도 산 자는 저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 말하고 다닌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다시 말하기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다들 살아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알면 알수록 늘어나는 것은 슬픔뿐이다. 이 슬픔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내 질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행복해진―한때 나와 함께 슬펐던 당신들이 있고, 그런 미래를 믿을 수 없는― '없음'을 믿고 있는 내가 있으므로. 너무 좁은 광장의 신자와 이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