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책방 그림
책방을 준비하면서 책방을 지탱해 줄 기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비전이랄까? 회사에 다닐 때도 비전은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비전은 갈피를 잃은 회사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회사든 책방이든 뚜렷하고 반짝이는 비전은 공감하는 분들의 숱한 응원을 받기 마련이다.
책방이 지향하는 비전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는 와중에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다른 책방들의 비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대전의 독립서점 '다다르다'의 "우리는 다 다르고,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어요."라던지 연남동 독립서점 '리댁션'의 "Lead Life, Read Action 내 일로 내일을 이끈다." 등이다. 비전이 명확한 책방들은 큐레이션, 인테리어, SNS 등 책방의 모든 요소를 비전이 감싸고 있었다.
다다르다의 큐레이션은 맥락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책과 공간을 매개로 사람과 대전이라는 지역을 연결한다. 리댁션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파다한 책방이자 공유 작업실로 일의 경계를 넘나들며 꿈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간이다. 모두 좋아하는 일로 즐겁게 사는 삶을 위해 함께 읽고 행동한다.
초심으로 돌아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나는 취향이 뾰족한 사람을 동경했다. 커피, 영화, 패션 등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만나면 그저 멋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취향이 뭉툭한 사람이라 늘 좋아하는 게 명확하지 않았다. 특별히 자랑할 만한 취향이 없기도 했다. "뭐 좋아해?" "어.. 음.. 커피를 좋아하는데 막 엄청 좋아하지는 않고.. 책 읽는 것 좋아하는데 막 깊이 알지는 못해.." (점점 동굴 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취향에 위계가 있는 게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취향과 취미에 서열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가진 소소하지만 명확한 취향이 보였다. SF 소설, 바닐라 라떼, 김밥은 클래식한 기본 김밥, 된장찌개 같은 것들이다. 깊이는 없을지라도 호불호는 분명했다.
직접 커피를 내려보지 않아도, 파도 위에 올라타지 않아도 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경험이 분명 있었다. 책을 읽다가 흥미가 생기면 배워보기도 했다. 박상아 작가님의 ≪아무튼, 요가≫를 읽고 요가를 시작했고 김초엽 작가님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SF 소설을 독파했다.
나는 이렇게 일상에 취향을 더해나가고 있다. 취향을 넓혀가려면 부딪혀보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분명해지면 삶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갈 수 있으니까. 경험으로 얻기 힘들다면 책에서 힌트를 얻는다. 취향을 더 풍부하게, 취미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가성비 훌륭한 방법이다.
요조 님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우리는 취미를 너무 잘하려고 하고, 특별한 것만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주변에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고 할 때 비아냥대거나 훈수 두는 분들도 있었다. 마치 피겨를 배운다고 하면 “김연아 될 거야?”라고 물으면서 말이다.
취미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금전이 아닌 기쁨을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이다. 취미는 말 그대로 취미여야 한다. 누군가의 취향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중심과 본질을 지키며 내면을 풍족하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니까.
방대한 카테고리 속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취향과 소통의 공간으로의 역할을 하는 서점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상에 취향을 더하는 취향 아카이빙 서점!
모두가 취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날을 오길 바란다. 서점은 일상에 취향을 더하기 위해 필요한 책과 경험을 쉽게 발견하고, 추천하고 배울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될 것이다.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고 격려하며 때론 자신만의 새로운 취향을 찾아가는 곳, 내 취향을 존중받는 공간이 되길 꿈꾼다.
오롤리데이가 발행하는 해피어레터에서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100에 대해 1을 알고 1에 대해 100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유명 잡지 BRUTUS의 편집장, 타지마 로 상의 말이다. 100에 대해 1을 안다는 건 넓고 얕은 관심을 의미하고 1에 대해 100을 아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어느 누구보다 빠삭해야 함을 말한다. 올해 나를 지탱해 줄 문장으로 삼고 (미래) 책방지기로서 다양한 취향에 문을 열되 좋아하는 분야는 조금 더 뚜렷하게 가꾸어 나가려고 한다.
내가 그린 책방 그림이 많은 분에게 가닿길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색을 칠해본다.
+ 인스타그램으로도 소식을 전하고 있어요. 궁금하시다면 찾아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