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반전의 서막

잠시 멈추고 지켜보는 것

by 물 긷는 자 연지신
회사 그만뒀다며?
우리 회사 대리점 해보는 것 어때?

임 사장한테 전화가 왔다. 한때 그는 LA 한인 중에서 사업을 가장 크게 했다. 처음에는 할리우드 거리에서 작은 시계 수리점을 운영했다. 거기서 장사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일제 워크맨을 끼고 음악 들으며 몸을 들썩이면서 다니는 걸 유심히 지켜봤다.

‘바로 이거다’

그는 즉시 전자 제품을 떼다 팔기 시작했다. 이게 대박이 나서, 본업인 시계 수리업보다 훨씬 장사가 잘됐다.


한인 타운에 변변한 전자 제품 판매점이 없던 시절, 그는 할리우드 볼 공연장을 빌려, 유명 가수들을 초청해서 공연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이 행사를 계기로 한인 신문에 양면 광고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런 승부수가 크게 성공을 거두며, 그는 40세 젊은 나이에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사업가로 우뚝 섰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으로 90년대 중반, 결국 파산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타주에서도 잘 알려져 있을 만큼 지명도가 높았다.


최근 재기를 노리며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건강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데, 대부분 5천 달러 이상되는 고가품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가장 꺼림칙했던 것이 그는 직원들을 압박하기로 정평이 났다. 어떤 직원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병이 도졌다고 하고, 또 어떤 직원은 눈에서 피가 터졌다고도 했다.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총판이고, 내가 대리점주라면 완전한 갑을 관계인데,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명운이 달라지기 때문에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웠다. 나는 즉답을 피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며칠 더 고민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갑자기 업종을 전환해서 전자 제품 판매점을 시작한 것,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할리우드 볼 행사, 일찌감치 베트남 시장 진출 등 그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집요함과 달리 어리숙한 순진함도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실수를 자주 저질렀다. 무엇보다 그는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들 말에 솔깃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이거다’ 싶으면, 누구 말도 듣지 않았다.

돈키호테가 생환한 것 같았다.

이런 이중성으로 인해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가 벌인 일 중에, 열에 아홉은 실패했지만, 그 한 번의 성공으로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뭔가를 벌렸다. 일은 그에게 단지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성취감을 주는 기쁨이고 삶의 의미였다.


한 번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정수기 렌탈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프리미엄 정수기 렌탈 사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어이가 없었다. 렌털 사업은 상당한 자금과 조직이 필요하고,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도 준비가 전혀 없는데 또 무리하게 벌리려는 것이다.

그는 믿음이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자주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믿음과 나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났다. 이건 단순한 욕심 정도가 아니라 무지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장님, 정수기 렌탈 사업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으세요?”

“전문가를 스카우트해서 데려 오려고. 마침 적임자가 있어요.”

“돈은 있으세요?”

“사업을 돈 가지고 하나? 목표를 세우고, 이뤄 나가는 거지.”


이미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이제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며칠 뒤, 마음에 결정한 사람을 스카우트하러 뉴욕으로 날아갔다.

김진혁. 정수기 렌탈 사업으로 유명한 회사에서 영업 책임자로 있다가 최근에 그만뒀다. 꽤 유능한 사람으로 업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 데려오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가 소셜 미디어에 남긴 글을 우연히 봤다.

‘새해 첫 주,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이곳은 눈으로 온통 하얗다.

긴장과 기대 그리고 설렘과 흥분…

성취를 미리 앞당겨 느낀다.

이것은 나만의 쾌감,

내가 사는 이유다.’


그가 뉴욕에서 돌아오고 얼마 뒤, 파격적인 조건으로 김진혁이 스카우트되어 왔다. 그는 오자마자 자신의 노하우를 임 사장 회사에 접목시켰다. 조직을 새로 구축해서, 과감히 영업 활동을 전개했다. 유능한 영원 사원들을 끌어 오기 위해 수당도 파격적으로 지급했고, 고객 할인 프로모션으로 많은 혜택을 제공했다.

이런 효과로 초반에 판매가 급격히 상승했다. 사장의 표정도 싱글벙글했고, 회사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대기업 방식이었고, 임 사장 회사는 모든 면에서 역량과 자금이 따라올 수 없었다. 실적은 곧 정체되었고, 이익은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두 사람은 서로 책임을 전가했다. 김진혁은 ‘회사가 지원을 안 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했고, 사장은 그가 너무 과장해서 떠벌렸다고 했다. 애당초, 두 사람은 성향이 맞지 않았다. 이해관계 때문에 잠시 함께 할 수는 있어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양쪽의 욕심이 달랐고, 차이도 너무 컸다.

결국 김진혁은 3개월 후 아무 예고 없이 사표를 던지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임 사장은 실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따라 도전, 모험, 용기, 만용, 객기 등 여러 말로 평가한다. 임 사장을 지금까지 끌고 왔던 동력은 이런 내용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꿈이 컸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이를 이루기 위해 많은 돈과 노력, 열정을 쏟아부었다. 대부분 즉흥적인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지속하기 어려웠고,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결국 이룬 것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실패는 걸림돌도 방해물도 아니라, 그저 지나야 할 과정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회사는 살아 움직였다. 회사는 생명 있는 유기체 같았다.


그 무렵 그는 한인 시장 만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베트남 커뮤니티에 주목했다. 한번 결심을 굳히자,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조사하고 준비했다. 먼저 베트남계 직원을 모집해서 교육했다. 효과적인 TV 방송국을 수소문해서 직접 찾아다니며 광고도 했다.


그의 원칙은 단순했다. ‘목표를 설정해서 집중하면, 이루어진다.’였다, 그는 ‘잠재의식의 힘’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확신을 갖고 있었다.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면 잠재의식에 새겨져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황당해 보이는 믿음 때문인지, 실제로 여러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잠재의식을 이야기하며, “목표를 구체화해서, 이렇게 노트에 적어 틈나는 대로 소리쳐요. 그러면, 잠재의식이 작동해서, 되게 합니다. 이건 실제예요.”


나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책에서도 몇 번 봤지만,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의지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게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을 믿음이라 했다.


베트남 시장 진출도 난관이 무척 많았다. 무엇보다 낯선 제품이었고,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다. 렌트비를 못내 건물주에게 경고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자 돈을 빌려 쓰기도 했다. 제 날짜에 이자와 원금도 갚지 않고 버티며, 채권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소리 지르며, “내가 돈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자꾸 이러시면 돈 받기가 더 힘들어요.” 협박을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 시장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이번에는 쉽게 그만두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심사숙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참 심하게 했어요. 너무 급했어. 실수도 참 많았고. 그동안 참 험한 시간을 지나왔어요. 돈이 많을 때는, 사람들이 왜 돈을 못 벌지? 이런 생각을 했다니까! 참 교만했지. 돈이 없을 땐 정말 기름값도 없더라고, 나 때문에 와이프가 참 고생 많았지…

언젠가 아들놈이 ‘아빠, 이젠 사업 그만하고, 엄마 고생 좀 그만 시켜요’ 할 때는 정말 할 말이 없더라고. 내가 뭣 때문에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와이프 하고 약속을 했어요. 이젠 함부로 벌리지 않기로..

이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 너무 늦지는 않았겠지.”


일을 벌이는 것’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고,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를 설명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던 수식어였다. 그가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멈추고 지켜보겠다는 약속이었다.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직원들에게 전보다 많은 권한을 주고 맡겼다. 회사 살림을 도맡아 하던 그의 아내를 손 떼게 하고, 함께 스위스와 캐나다 여행을 다녀왔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했다. 앞으로 2년 안에 세계 6대 마라톤 대회에 풀코스를 완주해, ‘식스 스타 피니셔’ 타이틀을 따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가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선택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인생 여정과 많이 닮았다. 늘 앞만 보고 질주하던 그가, 이제는 속도를 조절하며 완주를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 육체의 극한을 넘은 끝에 맞이할 환희 속에서, 성취보다 과정을, 결과보다 여정을 맛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새로운 길을 발견한 만족힘에 웃음이 가득했고 말도 많았다.


임 사장은 이민 1세대 성공과 쇠락의 드라마였다. 그의 퇴장은 이민 1세대의 퇴진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상징했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다.

이전 21화인생을 칠하는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