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 일정이 되는 곳, 치앙마이

아무나 오라 하지 않는 여행

by 하하

여행자 모드로 게으름을 즐긴다는 건, 생각보다 고급 기술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일. 그걸 죄책감 없이 해내는 능력.

치앙마이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다.
지인의 초대였다.
사실 망설였다.
연이은 여행 스케줄에 슬슬 남편 눈치도 보였고,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책임감 많은 사람처럼 굴고 싶었고, 동시에 아주 가볍게 도망치고도 싶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나, 아무나 오라 하지 않아.”
이 한마디는 이상하게도 비행기 티켓보다 강력했다.
선별된 초대라니. 괜히 귀해 보이잖아.
그녀의 호의를 두 번 거절하는 건, 예의도 아니고 자존심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쿨한 척하며 무너지듯 수락했다.

와보니 알겠다.
여긴 해야 할 일보다 햇살이 먼저다.
햇살은 생각보다 성실해서, 내 안에 오래 묵혀둔 감정의 찌꺼기까지 탈탈 털어 말린다. 그동안 괜히 심각했던 표정도, 쓸데없이 붙들고 있던 미묘한 서운함도 바삭하게 말라버린다.

함께 온 동생과 나는 점점 솔직해진다.
우리보다 더 솔직한 언니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나 사실 나 자신이 너무 모자라 보여 속상할 때가 있어.”
“나도.”
이렇게 쉽게 말해지는 순간들.

여행자 모드에서는 ‘잘해야 할 나’ 대신 ‘그냥 나’로 살아도 된다.
게으름은 미덕이 되고, 낮잠은 일정이 된다.
아무것도 안 한 하루가 제일 잘한 하루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깨닫는다.
여행은 완벽한 타이밍에 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흔들릴 때,
그리고 누군가 “가자”고 할 때
약간의 용기와 함께 그냥 가버리는 것이라는 걸.
적어도 치앙마이에서는,
게으른 내가 제일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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