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주는 약이고, 사랑은 범행이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 가면 나는 늘 긴장 상태였다.
낯선 집이라서가 아니다.
우리 할매 때문이었다.
우리 할매는 할아버지가 싫어하는 일만 정확히 골라서 하시는 분이었다.
“하지 마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셨다.
용감하다 못해 약간은 무모한 여자. 그게 우리 할매였다.
할아버지가 외출만 하시면, 할매는 고방 문을 슬쩍 열었다.
곡식을 자루째 몰래 꺼내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플라스틱 진주 목걸이랑 반짝반짝 불 들어오는 공주 구두를 사 오셨다.
“영아, 이거 해봐라. 공주 같다 아이가.”
나는 그걸 걸치면 세상 제일 화려한 공주가 된 것 같아 들떴다.
그런데 동시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어린 내가 봐도, 이건 들키면 큰일 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할아버지 오시기 전, 공주 구두는 이불장 깊숙이 숨겼다.
공주는 늘 은밀했다.
엄마가 “이 썩는다!”며 못 먹게 하던 엿도
할매는 낮에 살짝 고아서, 내가 누워 있으면
내 입에 쏙 넣어주고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참 문제였다.
공범으로 만드는 웃음.
어릴 때부터 한 덩치 하던 나를 볼 때마다
“아이고, 우리 영이 왜 이래 야위었노!” 하며
오만 걸 다 해 먹이셨다.
고모들이 “돼지!” 하고 놀리면
“연년생 동생 때문에 에미 젖도 못 묵고 부어서 그런 기다!”
괜히 더 속상해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할머니 집에만 가면
괜히 더 약한 척을 하며 더 잘 먹었다.
돼지처럼. 아주 전략적으로.
하루는 급하게 먹다가 체기가 올라 얼굴이 누렇게 질렸는데,
할매가 작은 잔을 들고 왔다.
“영아, 이거 매실주다. 한 꼬푸 마시라. 약이다 약.”
나는 또 심장이 철렁했다.
“할매, 이거 묵으면 안 된다. 이거 술이다.”
건넛방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봐
손을 뿌리치고 입을 앙 다물었다.
그때였다.
“영아, 그거 마시라. 매실이 약인기라. 쑥 내릴 끼다.”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 목소리.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 할매는 사고 칠 것 같아 늘 불안한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언제나 내 편이었고,
할아버지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는 더 큰 편이었다는 걸.
울 할매는
완전한 내 편이면서도
늘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나의 첫 번째 공범이었다.
오늘따라
씨익 웃으며 “약이다, 약!” 하던
그 장난스러운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