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려보자
제2형 양극성 장애(이하 조울증)를 치료해오면서 가장 중요한 숙제는 <생각 멈추기>였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생각이 많아져서 혼자 자기 연민이나 우울에 빠져서 불면증이나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게 조울증의 주요 증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멍 때리기, 명상, 생각 비우기, 자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등 머리를 최대한 쉬게 하고, 자기 전에 어떤 일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공부도 해보고, 글도 써보고, 운동도 해보고 생각을 비우기 좋다고 소문난 것들은 이것저것 도전해 봤다. 오늘은 그중에서 글쓰기만큼 누구나 하기 좋은 피포 페인팅과 그림 그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한국화를, 중학교 때에는 목판화를 했었다. 전교생이 100명인 시골 학교를 다녔어서 미술시간에 조금 성실하다 싶으면 미술 특기생으로 뽑혀서 6시까지 방과 후에 그림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잘 그리는 편을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4B연필을 토익 시험 보느라 잡고 그림 그리기 위해 잡아본 적이 없다. 중학생 시절로부터 벌써 15년도 더 된 시간이 흘렀다. 구도도 못 잡고, 그림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국화와 소나무 질감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산 그림노트와 연필은 서랍장으로 처박혔다.
낙담한 채로 사무실에 앉아서 발견한 것이 피포 페인팅이었다. 피포 페인팅은 보통 명화 그리기라고도 불리는 데 이미 밑그림이 있는 캔버스에 숫자가 인쇄되어 있고, 그 숫자에 매치되는 물감으로 빈칸을 채워나가면 되는 일종의 색칠공부다.
인터넷에 보면 서양화, 동양화, 반 고흐, 모네, 클림트, 풍경화, 인물화, 점묘화, 추상화, 일러스트 등등 웬만한 그림은 이미 상품으로 나와있다. 애용하는 쇼핑몰에 들어가서 <DIY 명화 그리기>만 검색해도 수십 개의 상품이 나온다. 나는 지금까지 총 5개 정도 했는 데 그림 난이도에 따라서 소요시간은 달라진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3주 정도 걸렸다.
피포 페인팅의 장점은 그림 칠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다. TV나 라디오를 틀어놓거나 음악을 틀고 한번 시작하면 2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한참 할 때는 앉아서 5시간 이상 한 적도 있다. 그리고 다 완성되었을 때 거기서 오는 성취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처음 도전하는 거라면 좀 쉬운 그림으로 해보고 점점 난이도를 높이는 것을 추천한다. 처음부터 어려운 걸 하면 너무 오래 걸려서 물감이 굳어서 못쓸 수도 있고, 힘들어서 중간에 질려버릴 수도 있다.
피포 페인팅에 질려 가고 있을 때쯤 한 연예인이 민화 클래스를 다니는 영상을 발견했다. 먹을 갈고, 붓으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걸 보니 예전에 학교 뒷산에 앉아 풍경화 연습을 하던 추억이 생각났다. 지금은 지필법이나 한국화의 기초도 많이 까먹었지만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서재 방에서 벼루에 먹을 가는 데 방과 후 텅 빈 교실의 나무 바닥 냄새가 기억났다. 다시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설레었다. 그땐 하루에 국화 20송이, 소나무 5그루씩 그리면서 지겹게 연습했었는데 지금은 지도해주실 선생님이 안 계시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교본을 하나 주문했다. 귀여운 동물을 그리고 싶어서 동물 그리기 교본을 샀다. 초등학생을 위한 기초 교본이었지만 몇 개는 그리기 어려웠다.
이미 굳은 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웃긴 그림을 그려냈다. 근데 그건 그거대로 재밌고, 기분이 좋았다. 못 그리면 못 그리는 대로 잠시 동안은 고민하고, 집중하느라 잡생각도 안 나고 완성본을 SNS에 올렸을 때 DM으로 날아오는 친구들의 반응도 웃겨서 그리는 보람이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지방이라 입시미술학원 두세 개 말고는 한국화를 배울 곳이 없다. 입시학원도 한국화 입시를 위한 수업만 있어서 유튜브로 독학 중인데 시간이 나면 클래스 101을 통해 자세히 배워볼 생각이다.
수채화, 오일파스텔, 유화, 색연필…
요즘엔 원하는 분위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미술도구가 상당히 많다.
핀터레스트를 보면 따라 그릴만한 그림도 넘쳐난다.
앞에서 말했듯, 우울하거나 생각이 많을 땐 다른 집중 거리를 찾는 게 좋다.
그림은 과정도 재미있고, 못 그린 것 같아도 노란 불빛 아래 놓고 사진 찍으면
나름 SNS용 감성 사진처럼 나와서 괜히 걸작 하나 몰래 탄생시킨 기분이 난다. 성취감 있는 취미라는 의미이다.
여러분도 생각이 많아지고, 퇴근 후의 시간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면
굴러다니는 펜으로 오늘 장 봐온 음식이나, 반려 동물을 그려보자.
그러다 보면 잘 시간이 코앞이다.
(단, 적어도 취침 1시간 전엔 중단하자. 자기 전에 집중력이 높았지만 불면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