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풀어내는 내뇌망상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中
오늘은 하루 종일 이번 이야기와 어울리는 노래를 떠올려봤다. 제일 먼저 떠오르고 오늘의 긴 이야기를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노래가 있었다. 바로 시인과 촌장이 부른 <가시나무>다. 아직 30대인 나는 시인과 촌장의 원곡보다 조성모가 리메이크 한 노래가 익숙해서 그 버전을 듣는다. 웃긴 게 너무 자주 들었던 노래라 그런지 생각이 많아져서 두통이 올 때쯤이면 머리에서 조성모 특유의 미성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자동 재생된다.
나의 경우 조울증 기간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다른 제2형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듯 난 생각을 1초도 멈춰본 적 없어서 일부러 생각을 적게 할 수 있는 항우울제를 복용했었다. 생각은 좋은 생각보다 부정적 생각이 많았고, 그중엔 극단적인 생각도 있었으며, 망상에 가까운 생각도 어느 정도 자리했다. 약에 익숙해진 지금은 용량을 늘려서 생각을 강제로 없애기보단 글로 쏟아내서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처음엔 일기로 시작했다. 일기에서 팬픽, 소설, 지금 에세이까지 글쓰기 장르는 점점 다양해졌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글쓰기로 극복하는 조울증'이다.
요즘 청년답지 않게 유사과학을 좋아하는 나는 사주, MBTI를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가장 적은 비율인 INTJ라는 점에서 내가 특별하게 느껴져서 MBTI결과에 만족하고 있다. I(내향형), N(직관형: 상상을 즐기는 특징이 있다.) 비율이 꽤 높은데,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시골에 살던 나는 혼자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걸 즐겼고, 친구와는 논두렁 옆에 어른들이 버린 뼈 무더기를 발견하고 살인가건 현장에 온 탐정놀이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 창의적으로 망상하길 좋아했다. 청소년기에도 도움도 됐다. 백일장에 나가면 상도 자주 타고, 도 대표로 몇 번 대회에 나가서 글을 쓴 적도 있었다. 리포트 쓰기에도 너무 바빠서 다른 글을 못 썼던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글쓰기를 놓아본 적은 없다.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건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몇 개월 이후였던 것 같다.
한 동안은 피해망상 같은 불안장애때문에 그 아까운 망상 능력을 낭비했었다. 범ㅁ불안장애는 정말 힘들다. 모든 사람한테 비웃음과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이 하루 종일 느껴진다.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커플의 다정한 웃음소리가 나를 향한 비웃음으로 들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며 떠드는 학생 무리가 내 험담을 하는 것처럼 들려서 다른 코너를 뱅 둘러 물건을 집으러 가야 했다. 그때 당시 일기를 보면 '힘들다', '미치겠다.' 하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리를 비워냈다. 그렇게 일기를 쓰며 울기도 하고, 가끔은 나쁜 내용을 써도 예쁜 스티커로 내용을 꾸며서 스트레스를 그 안에 최대안 욱여넣었다. 그러면 좀 나아진다. 안네의 일기처럼 일기장을 친구 삼아, 대나무 숲 삼아 털어놔 보는 거다. 나는 심지어 학원 강사를 하는 동안은 수업시간에 나를 괴롭힌 학생에 대해서도 써놓은 것도 있다. (아마 내 불안장애에는 그 애도 한 몫했으리라 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문법, 어휘 상관없이 하고픈 말은 다 써보자. 무기력이 너무 심해서 팬을 잡는 것조차 힘들다면 핸드폰 메모장에 쓰는 한 문장도 좋다. 단, 조증, 경조증 일 땐 주의하자. 충동성이 강해지는 시기라 점점 더 부정적인 감정을 키우다가 안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실제로 양극성 장애 환자의 자살률은 조증 시기가 높다.)
피해망상이 심해질 때 먹는 필요 시약을 복용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 드라마와 영화를 몰아봤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멋진 연기에 감탄함과 동시에 그 캐릭터의 드라마 외의 삶은 어떨까? 하는 다른 망상의 시작. 멘털 치료의 첫발이었다.
엄태구 배우의 팬인데 특히 <구해줘 2>와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나온 엄 배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 안의 캐릭터를 이용해 단편을 써서 개인 소장했다. (이 나이에 팬픽 쓰는 게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캐릭터와 배경만 차용해서 웹소설이나 단편소설 느낌을 낸 소설이라 아이돌 팬픽만큼 자극적인 팬픽이 아니었다.) 그러다 몇 개는 나만 보기 아까워서 팬픽 커뮤니티 같은 곳에 단편을 올렸다. 팬픽으로 인기가 많은 배우가 아님에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댓글을 읽고, 조회수가 올라갈 때마다 글을 더 많이 썼다.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팬픽 내용을 생각하느라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 피해망상과 팬픽 망상(?)의 비율이 역전된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엔 카페에 갈 수도 있게 되었다. 예전엔 노트북이나 책을 들고 카페에 가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로 들려서 오래 있을 수 없었지만 팬픽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시간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커피를 주문하고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음악을 듣지 않는데 말이다! 효과는 대단했다. 이런 이유로 내 피해망상 극복엔 엄태구 배우의 지분도 꽤 된다.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아바라 한잔 사드리고 싶다.
왕년에 아이돌 팬픽을 써봤던 사람이라면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 쓰면서 풀어놓는 상상들과 묘사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키보드 위의 손가락이 얼마나 자유로울지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좋아하는 영화 캐릭터로 가벼운 소설 한 편만 써보자. 좋은 리뷰가 달릴 때 넘쳐흐르는 그 도파민이 너무 짜릿해 놀랄지도 모르니까.
팬픽을 쓰다 더 다양한 설정과 내용에 갈증을 느낀 나는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집에서 소설책을 자주 읽는 데 좋은 묘사나 문장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써보고 싶어!'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아마 경조증시기였나 보다. 주로 이런 큰일은 경조증 시기에 벌여놓고 울증 기간에 울면서 꾸역꾸역 마무리 짓는다. 경조증이 좀 그렇다. 무슨 일이든지 자신감이 붙어서 앞뒤 안재고 도전해버리는…….
그렇게 처음 도전한 건 웹소설이었다. 웹소설 플랫폼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냥 글 쓰는 거에 만족한다면 자신이 골라서 연재해도 좋을 거 같다. 나는 당시 봄툰에서 글만 써도 한편당 1,000원이 적립되는 자유 연재로 글을 쓰기로 했다. 1개를 연재했는데 총 18편을 썼다. 경조증에 흥분해서 설정을 제대로 안 짜고 시작한 연재라 중간중간 수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조회수 올라가는 것과 내가 한 편 한 편 완성해서 업로드를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날 뿌듯하게 했다. 봄툰 웹소설은 3편 정도 쓰면 완결이 날 것 같다. 3만 원부터 환급 가능한데 한가할 때 한 편 더 열심히 써서 3만 원 환급을 꼭 받고 말 것이다.
지금은 자기 전에 조금씩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 이런 소설을 처음 쓰는 거라 어려움도 많지만 조금씩 쓰고 있다. (퇴고를 너무 자주 해서 3개월째 25%도 못 썼다.) 이것도 재밌다. 나의 머릿속에 있던 온전한 묘사와 문장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글을 쓴다는 것이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래서 브런치에도 우선 직업란에 작가 지망생을 선택해놨다. 작가를 꿈꾸긴 하니까 말이다. 아마 지금쓰는 소설이 출판은 아마 안될 것 같지만 성취감을 위해 끝까지 써보려고 한다. 지금은 울증 기간인지 무기력이 좀 심해서 창작으로 글 쓰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아마 오랜 시간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 완성되리라 믿는다. 아마 경조증의 내가 여러 출판사에 내 소설을 책으로 내달라고 제안하며 다닐지는 모르겠다.
사실 조울증에 글 쓰는 게 쉽지는 않을 수 있다. 나의 경우도 생각만 많은 거지 인지기능은 많이 손상돼서 내용 정리가 어설프거나 어휘가 한정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울증의 절정이다? 누워서 바디필로우처럼 있어도 힘든데 생각을 하고, 팬을 들고,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라고? 마라토너의 질주만큼 힘들다.
그래도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 쓰다 보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이 생기고, 나를 다독여 줄 힘이 생긴다. 글로 하는 명상인 셈이다. 창작이 어렵다면 필사도 괜찮다. 서점에서 괜찮은 시집 하나 사서 하루에 한 편, 한 편이 힘들면 마음에 드는 한 구절만이라도 써보자. 오글거린다는 표현은 잠시 접어두고 그 시간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 짧은 시간 당신이 쓴 문장이, 글귀가 무기력으로 메마른 마음을 한 줄기 감성이 촉촉이 적셔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