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nama]
운동을 시작했다.
코로나의 여파, 데이트와 반주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연애, 더 이상 엉망진창인 내 식습관을 받아줄 여력이 없어진 쇠한 몸뚱이 등의 총체적 난국을 거쳐 근 1~2년 사이에 10kg이 늘었다.
하지만 몸무게 앞자리 수가 바뀌고, 작아서 못 입는 옷이 한가득 쌓이고, 가끔 만나는 가족들의 잔소리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살크 업 중이야"라던지 "이거 찌우느라 돈이 얼마나 든 줄 알아?"라는 실없는 소리를 능청스럽게 내뱉으며 무심코 넘겼다.
가끔 배가 터질 듯한 과식과 과음을 마친 뒤에 잔뜩 나온 뱃살을 통통 치며 "이게 뭐야"라고 푸념하면 "뭐긴 뭐야, 인격이지!"라는 나보다 더 실없는 소리를 내뱉는 Z의 마인드도 내가 살에 무감각해지게 하는데 한몫했다. (살찌는 데에는 열 몫 정도 했다.)
그러나 없던 살이 붙자 그나마도 희미한 존재감을 나타내던 근육들은 갑자기 불어난 지방의 무게를 버거워 하기 시작했다.
금방 숨이 차고, 한 것도 없이 피곤에 절어 늘어지고, 원래도 좋지 않던 허리는 매 순간 내 등 밑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내게 상기시키려는 듯 악악 거렸다.
맘은 살이 쪘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데, 몸은 도무지 이게 내 무게라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몸이 보내는 시그널을 산뜻하게 넘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야, 나는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라고 편협하게 치부하던, 무려 PT를 받겠다는 다짐까지 할 만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PT상담 첫날, 트레이너는 운동 목표와 평소 식습관이나 생활습관 등을 내게 물었고 필터 없이 내지른 내 대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운동 목표를 체력증진, 체중감량, 체형교정 중에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고 계세요?
- 그냥 허리 안 아프게 걸을 수 있게 되기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 음.. 식사는 보통 어떻게 하시나요?
-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회사에서 먹고 저녁엔 맛있는 거 배 터질 때까지 먹어요.
- 커피는요?
- 하루 두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 음주는 주 몇 회 정도 하세요?
- 몇 회라기보다, 그냥 저녁 먹을 때 맥주 한두 잔씩 먹는데요.
- 저녁 드실 때면.. 그럼 술을 매일 드시는 거예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 하.. 그럼 물은 얼마나 드세요?
- 물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한두 모금? 근데 아메리카노가 물 아닌가요?
- 물이 들어가긴 하지만 물은 아니죠. 커피는 오히려 수분을 배출시켜요.
- 그럼 에스프레소 원샷 때리고 따로 물 마시면 되나요?
- ...
짧은 대화 후 트레이너는 잠시 말을 잃었고, 눈치 빠른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 운동은 하겠지만 식단과 음주는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내 쓸데없는 단호함에 트레이너의 수심은 한층 깊어졌다.
물은 하루에 2L는 마셔야 하고 아침도 꼭 챙겨 먹어야 하며 술은 주 2회 정도로 줄여야 한다는 다 알지만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건강한 삶의 비법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렇게 운동이 시작되었다.
운동은 내게 조금 복잡 미묘한 존재인데,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지만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지만 하고 싶지 않달까.
내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몇 년을 자극적인 음식과 음주, 구부정한 자세 등 다채로운 스킬로 괴롭히던 내 몸뚱이를 다른 방식으로 혹사시키기 시작한 지 이제 2주 차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근육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고, 나는 일어날 때, 앉을 때, 설 때, 구부릴 때 등 갖가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아이고-' 하며 소리 있는 곡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아파서 건강하자고 하는 운동인데, 하다 보면 더 아픈 딜레마의 시기를 거쳐내야만 건강한 몸뚱이를 가질 수 있다니. 정말 세상에 호락호락한 게 하나 없구나.
아직 서른밖에 안됬는데라고 해야 할지, 이제 서른이 되어서라고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하지만 이제는 운동을 해서 예쁜 몸을 만들고 그래서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하고 다니고 싶다는 욕심보다, 건강해져서 충전과 동시에 방전되는 오래된 휴대폰 같은 내 몸의 배터리를 새로 갈아 끼우고 싶다는, 그래서 더 건강하게 먹고 마시고 싶다는 바람으로 운동을 한다.
자칭 '돈 쓰면 돈 값은 하는 사람', 타칭 '의외로 은근히 말을 잘 듣는 사람'인 나는 PT 받겠다고 들어간 거금을 몸뚱이로라도 회수해보겠다는 다짐과, '안돼요', '못해요'를 입에 달고 철벽을 치면서 막상 시키면 또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하는 기이한 습성을 십분 발휘하여,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모닝커피 대신 물을 마시고 평일에 술 없는 저녁을 보내고 있다.
고되었던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 주던 맥주 한잔이 빠진 저녁은 조금 허전하지만 한 주의 피로를 씻어내 줄 주말의 한 잔을 고대하며 4일째 술과는 잠시 애틋한 이별을 진행 중이다.
연애든 술이든 커피든 좋아하는 걸 오래도록 건강하게 즐기려면 넘치지 않게 적당히 해야 한다는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며.
[아무튼, 피트니스]를 읽으며 요란하게 운동의지를 불태우던 나는 결국 다음 책으로 [아무튼, 술집]을 읽고 있다. ([아무튼, 술]은 진즉에 읽었다)
[아무튼, 피트니스]의 과정을 겪어내면 [아무튼, 술집]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술집에서 다양한 안주와 다양한 술의 향연을 즐길 수 있겠지- 라는 내 멋대로의 꿈나래를 펼치다 보니 술에 진심인 내게는 그게 더 운동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뭐든 강력한 목적과 동기가 있어야 힘차게 굴러가는 법이다.
건강한 애주가가 되기 위하여 나는 열심히 몸을 굴린다.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수분 섭취로 인하여 수시로 화장실을 오가며, 화장실 다녀오기도 일종의 운동이니 나는 하루 종일 운동 중인 거라는 정신승리도 잊지 않고 챙긴다.
드디어 내일은 회에 소주를 한잔 하겠다는 완벽한 계획을 세워보며,
오늘도... 운동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