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보낸다는 말에 혹해서…

2장 그 시절의 종갓집 시집살이

by 이수영


할아버지랑은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친고모가 중매를 해줬어. 우리 고모가 금정(남편의 고향, 영암군 금정면)으로 시집을 갔었거든. 그래서 느그 할아버지 집안을 알아 갖고 해준 거지.


그때 내가 스물두 살이었어. 얼굴도 한 번 제대로 안 보고 시집갔제. 시키면 시킨 대로만 해야 하는 줄 알았지. 나한테는 전혀 물어본 것도 없어. 누구한테 싫다 좋다 표현할 수도 없고.


한 번은 느그 할아부지가 한 번 먼발치로라도 나를 볼란다 했나 봐. 그래서 고모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어. 근디 우리 아버지가 아주 고지식해갖고 맞선 볼 생각 없으니까 우리 집 오지도 말고 그냥 가라고 했대.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와.


근데 우리 약방 작은아버지는 마음이 고와. 근께 여까지(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그냥 보내겄냐고 그랬나 봐. 그래서 고모가 나한테 “장독에서 장 좀 떠갖고 온 것만이로 얼른 밖에 나왔다 들어가그라” 그러더라고. 나는 인제 시킨 대로 했지. 그때 느그 할아버지가 문을 살짝 열고 나를 봤다개. 나는 못 보고.


그 뒤로 한 번은 날 받아놓고(날 잡아놓고), 고모가 영산포(나주 영산포)로 나를 데리고 갔어. 그때 (남편을) 처음 한 번 봤지. 부끄라워서 제대로 쳐다도 못 봤지. 남자 얼굴을 어떻게 빤히 쳐다보냐? 그때는 그런 게 아니여. 곁눈질로 봤는데 인물이 아니야, 인물이. 눈에 안 들어오드라고.


근데 그때 너희 할아버지가 내가 키가 작다고 반대를 엄청 했어. 근데 “키가 작아도 어느 누구한테도 빠짐없이 내놓을 만하니까 내가 친정 질녀(조카딸)를 데려온 것 아니냐”고 고모가 그런께 할아버지가 그래도 마음을 받아들였더라고. 여그(남편네)는 외아들에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들까지 있으니 그동안 중매가 안 들어왔는 갑더라.


근데 왜 할머니 고모는 거기 집안이랑 중매를 해 주려 했을까요? 이유가 뭐래요?


부자는 아니어도 밥 먹고 살고, 살만큼은 살았제. ‘아들, 며느리 시골에다 농사짓게 안 한다, 어쩌든이 도시로 내보내겠다’ 항상 그런 말을 했나봐. 그런께 고놈에 내가 반해부렀어.


내 생각에 아주 부잣집이 아니어도 대장손에 공부도 할아버지가 많이 했고. 나는 공부에 한이 되았는데, 남편이라도 고등학교까지는 나왔으니까 남 앞에 가서도 떳떳하고잉? 내가 도시 생활하면서 시가집 가끔 가서 시부모들한테 잘해주고, 그럴 생각에 마음이 가버렸어.


어려서부터 가정에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다 이렇게 수하고(장수하고) 사는 집안이 좋은 집안이라는 것을 느꼈어. 그렇게 딱 내가 원하던 (조건)대로 다 되아 가는 거야. 글고 내가 바느질도, 반찬도 여자로서 헐 만큼 다 배웠고 하니까 어느 누구한테 가도 두렵지 않았어.


할머니-할아버지의 결혼식 (1967)


결혼식은 우리 집에서 했어. 옛날엔 다 그랬지. 신부의 심부름을 하녀가 다 해줘. 글고 여자 집에 남자가 먼저 와갖고 하룻밤 자고, 인자 남자 집으로 가. 그날 남자 집에서 결혼식을 또 하지. 시가는 신부 온 날이 결혼식 날이여.


시댁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3일 만에 친정에를 다시 가. 아조 옛날에는 겨우 일 년 만에 갔단다. 나 결혼할 때는 3일이믄 갔어. 가서 또 3일 있다가 오지. 글고는 쭉 시집살이하는 거지.



그때는 옷을 손수 만들어갖고 시댁에 가. 바지, 저고리, 시어머니·시아버지 옷, 시할아버지·시할머니 옷, 이부자리까지 해서. 그때는 돈이 아니라 이런 게 오고 가고 했지. 또 남자 집에서는 함에다 비단 옷감을 보내와. 그간 품앗이도 많이 해놓고, 집안에서 외아들 한나 결혼시키니까 여기저기서 옷감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근께 아주 한가득 됐제. 하하하.


할머니가 시골에서부터 25년 동안 사용해 온 석작과 솥쿠리. 음식을 담을 때 쓰는 용기.


결혼식에 쓸 음식도 당일에 다 준비해서 갖고 가고, 폐백(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를 뵐 때 큰절을 하고 올리는 음식)도 싹 해서 보내지. 떡은 양부모 계시면 두 가지, 한 분 정도만 계시면 한 가지. 그렇게 해서 떡 하고 생선 해서 석작(대나무로 만든 뚜껑이 있는 바구니)에다 담아서 가.


3일 만에 이바지해서 갖고 가믄, 또 3일 만에 거그서(시댁에서) 또 이바지해 갖고 와. 지금은 그걸 양쪽이 서로 한디, 그때는 여자 집서만(집에서만) 남자 집으로 폐백이 가.

남자 집은 떡만 해갖고 술 한 병 받고 간단하게만.


폐백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집안에 오빠들 중에 한문 글씨를 쓰신 분들이 있어. 큰 붓으로 일부러 엿을 묻혀서 음식에다 글씨를 써. 인자 그 위에 검정깨를 붓으면 검정깨가 글씨가 딱 되는 거야. ‘행복’이랄게, ‘자수성가’랄게 그런 걸 쓰지. 음식 하나 장만하는 데도 그렇게 보기 좋게 온갖 정성을 쏟아.


생선 하나에도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옷 다 입히고, 생선은 생선대로, 육고기는 육고기대로. 그렇게 해서 석작에다 담아서 축하한다고 보내. 그것이 친정의 품위 자랑이지. 그런께 폐백이다 하믄 동네 어르신들이 싹 모아갖고 정성을 쏟아. 지금은 그것도 저것도 없어져 분께 단출하니 좋은 세상이야.




그때 그 시절의 혼례 풍경

할머니의 혼례는 신부 집 마당에서 치러졌다. 그 시절 결혼식은 대개 신부의 집에서 열렸다고 한다. 신랑은 혼인날 아침, ‘초행’이라 불리는 길을 나섰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조상을 모신 사당에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 초행은 단순히 신부를 맞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한 가정을 새로 꾸리기 위한 첫 의례이자 집안의 안녕을 비는 시간이었다.

혼례를 마친 뒤 신랑과 신부는 신부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함께 신랑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시댁으로 들어가는 이 길을 ‘신행’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신행을 가는 시기가 제각각이었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 혼례를 치른 당일 시댁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신부는 시아버지의 도포 등 혼수와 폐백 음식을 마련해 들고 갔고, 신랑 집에서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분주히 준비를 했다. 마당에는 솥뚜껑이 걸리고,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여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했다. 그 시절의 혼례는 한 집안의 일이기보다, 온 마을이 함께 치르는 큰 행사에 가까웠다. 옷감을 보태고, 일손을 거들며 서로 돕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신랑 집에 들어간 뒤에도 절차는 이어졌다. 보통 사흘이나 일주일 안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는 ‘재행’을 했다. 이때 신랑은 처가 부모와 친척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혼례 직후 곧장 재행을 갈 때는 술 한 병과 닭 한 마리 정도를 들고 갔고, 달이나 해를 넘겨 가는 경우에는 떡과 술, 고기 등을 넉넉히 마련해 갔다고 한다. 친정에서 다시 사흘을 보내고 시가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신부는 시가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인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일상의례사전)』에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