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넷이 되도록 여태 싱글인 탓에 종종 저런 질문을 받는 일이 심심찮게 생긴다. 그럴 때 필요한 적당한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에이, 지금 이 나이에 그런 걸 따지겠나요’ 또는 ‘착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요’라는 식의 뻔한 대답들. 그 정도의 대답이 나를 적당히 제 주제도 알고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번 솔직히 말해볼까? 내 이상형은 [한낮의 유성]의 ‘시시오 사츠키’다. 그렇다, 무려 순정 만화의 남자주인공이다!
이상형으로 만화 주인공을 말하는 여자라니, 정말이지 철딱서니라곤 일 그램도 없어 보인다. 허황된 망상에 빠져서 결혼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을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떤가, 나는 그런 철없음을 좋아해서 여태 만화를 끼고 사는 어른이다.
시시오 사츠키는 아주 수려한 미모에 키가 훌쩍 크고, 사교성이 좋아 만인에게 환영받는 인기쟁이며, 센스와 유머를 겸비한 장난꾸러기인데, 그럼에도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 미스테리한 사람이다. 정말 만화 주인공답다. 비현실적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저런 게 이상형이라니, 그런 사람이 현실에 있을 것 같냐’고 웃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홀로 상경했다. 미대 입시를 위해서였다. ‘인서울’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합격했던 지방대를 마다하고 재수를 택했다. 홍익 미대를 나온 사촌오빠가 소개해준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학원 옆 건물 옥탑방에 세를 얻었다. 일부러 학원 바로 옆으로 정했다. 오가다 다른 길로 샐 수 없게. 학원, 집만 다니면서 그림만 그리고 공부만 하려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미술학원 입시반의 선생님으로 그를 만났다.
사차원 시골 소녀 요사노 스즈메는 아버지의 해외 전근 때문에 정든 시골을 떠나 삼촌이 있는 도쿄에 간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스즈메는 우연히 마주친 특이한 차림새의 수상한 남자의 도움으로 겨우 삼촌 집에 도착한다. 어쩜 이런 우연이 있는지, 수상해 보였던 그는 알고 보니 삼촌의 친구였다. ‘사실은 좋은 사람이었구나’ 스즈메는 그가 묘하게 신경 쓰인다. 또 볼 일이 있을까 싶었던 그와는 다음날 전학 간 새 학교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 못 알아보게 멀끔해진 차림으로 그가 인사한다.
안녕, 나는 담임인 시시오야, 잘 부탁해.
선생님은 타지에서 올라와 서울 아이들 틈에서 겉도는 나를 많이 신경 써주셨다. 소심하고 말수가 적은 나는 절대 말 한마디 먼저 하는 법이 없었는데, 선생님은 절대 나에게 말을 하라고 떠밀거나 용기 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나를 대화의 주제로 만들어 주목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얼마 안 가 아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잘 다뤘고 섬세하고 다정했다. 그 다정함이 얼마나 능숙한지 절대 과하거나 느끼하지 않았다. 얼마나 연상이면 이렇게 능숙할까, 문득 궁금해져 나이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응, 나는 너희랑 동갑이야! 띠동갑!"
동안도 정도가 있지. 기껏해야 네다섯 살 오빠인 줄 알았는데 열두 살 연상이었다. 애써 놀라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렇게 놀랄 일인가. 왜 우울해질까. 그래서 알아챘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걸.
모든 순정만화가 그렇듯 스즈메는 금방 사랑에 빠진다. 힘들 때 위로해주고, 아플 때 돌봐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시시오에게 스즈메가 빠져드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시시오 역시 엉뚱하면서 순수한 스즈메를 이성으로 의식하고 연애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금단의 관계이기 때문에, 시시오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몇 번이나 스즈메의 고백을 거절한다. 낙심한 스즈메는 시시오를 잊으려하지만, 시시오는 자꾸만 스즈메를 향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한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왜 더 바보같이 행동하게 되는 건지. 시간이 지나 여름이 되었을 때, 학원에 내가 선생님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나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겉으로 티가 날까봐 부러 선생님에게 쌀쌀맞게 군 까닭이었다. 선배와 친구들은 선생님이 저렇게 친절한데 이해가 안 된다고 날 타박했고, 선생님은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며 태연했다. 오로지 나만 속이 탔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렇다고 싫어한다고 오해받는 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스즈메를 향하는 마음을 막을 수 없었던 시시오는 사랑을 고백하고 스즈메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는 순탄치 않다. 남에게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자꾸 숨기게 되고 엇갈리게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둘 다 지쳐갈 즈음, 스즈메의 삼촌에게 두 사람의 사이를 들키게 된다.
삼촌은 시시오를 불러내 스즈메와의 결별을 종용한다. 시시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같은 역경에도 어린 스즈메는 희망을 보지만 어른인 시시오는 현실을 본다. 결국 시시오는 스즈메에게 이별을 고한다.
다행히도 짝사랑의 감정에 취해만 있기에는 입시 준비는 너무 바쁘고 힘들었다. 선생님 말고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너무 많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감 부족에서 오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다 보니 짝사랑의 아픔 정도는 가뿐했다. 가을에 접어들었을 땐 시험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애초에 고백할 생각도 없고 대가도 바란 적 없는 짝사랑, 마음에 고이 묻어두고 그림에 몰두했다.
겨울이 되자 학원에 치정싸움이 빈번해졌다.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예민해진 학생들이 연애에 신경을 돌려 불안을 잊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였다. 정도는 꽤 심각해서 남학생끼리 한 여학생을 두고 치고받고 싸우다 팔이 부러져 그림을 못 그리게 되기도 하고, 그 사이에 낀 여학생이 가출을 해서 시험을 보러가지 않기도 했다. 모두 어리고 무모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청춘이라 그렇다지만 훗날에 너무 뼈아플 혈기였다. 지금 그렇게 소중하다고 부르짖는 사랑이 나중엔 너무나 후회되는 흑역사가 되지 않을까. 나는 아예 넘볼 수도 없는 선생님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즈메에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오랜 기간 스즈메를 짝사랑하며 옆을 지키던 동갑내기 친구 마무라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스즈메는 여전히 마음속에 시시오가 남아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마무라를 사랑해 보기로 한다. 시시오는 스즈메와 마무라, 두 사람의 사이를 알아채고 동요한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솔직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스즈메 역시 시시오에게 흔들리지만 모른 척 도망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토록 바라던 인서울에 성공했다. 시험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학원을 나왔지만, 이걸로 그냥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추억과 좋은 결과를 얻었다. 뭘 더 바랄 게 있을까. 게다가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선생님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다시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 건, 입시 동기에게 받은 '곧 우리 학원이 사라진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학원이 있다면 언제든 선생님을 만나러 갈 수 있을 테지만, 학원이 사라진다면 선생님을 만날 방법도 없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참을 수 없어졌다. 이미 포기한 고백이었는데, 이제라도 선생님께 ‘싫어한 게 아니라 좋아해서 쌀쌀맞게 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학원을 졸업했으니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왕 가는 거 예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가고 싶었다. 엄마가 입학 기념으로 사준 뾰족구두를 신고, 고대 오빠들과 미팅할 때 딱 한 번 입었던 아끼는 노란색 시폰 블라우스를 입고, 어설프지만 화장도 하고, 마침 새로 한 웨이브 파마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기대감에 부풀어서 학원으로 출발했다. 학원으로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마무라와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으며 스즈메는 마무라에대한 애정을 조심스럽게 키워나간다. 아직도 시시오의 생각에 멈칫거리는 순간이 있지만 그래도 꽤 순조로웠다.
그런데 그때, 삼촌을 통해 시시오가 사고를 당해 다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스즈메는 너무 걱정이 되지만 마무라를 위해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오히려 마무라가 어서 가라고 스즈메를 떠민다. 모른 척 피하지만 말고 네 마음을 확실히 정하라고. 결심한 스즈메는 이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끝내기 위해 시시오를 만나러 간다.
이후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제와 생각하면, 내 고백 따위가 없었어도 선생님은 이미 손바닥 보듯 훤히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서른두 살 어른인 선생님이 열두 살 어린 여자애가 이유 없이 쌀쌀맞게 굴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쟤가 날 좋아하는구나'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 고백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버렸다. 평소 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선생님이었는데, 그날따라 그는 이것저것 급하게 질문을 하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 없게 했다. 말의 중간중간 계속 바쁘다고 티를 내면서 자꾸 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좀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대화 중에 나는 어느새 깨달았다. 내 고백은 이미 거절당했다는 것을.
매년 여학생에게 서너 번은 고백 받는다는 인기 많은 선생님은 거절마저 너무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어린 학생이 최대한 상처받지 않게, 자기 쪽에서 거북한 소리를 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포기하게 만드는 법. 선생님이 참 능숙해 보여서 멋있었는데, ‘능숙하다는 거, 참 재수 없네’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엔 내내 정신이 없었다. 내 발로 내가 걸어 나왔지만 황망히 쫓겨나온 기분이었다. 나는 걸으며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됐어. 된 거야. 그냥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만 말하고 싶었던 건데, 선생님 이미 아시는 것 같았잖아. 그럼 됐어.”
지하철에 도착해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자,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다 된 건데, 분명 그랬는데 눈물이 막 터져 나왔다.
내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좋은 어른이기 때문이고, 선생님이 열두 살이나 어린 제자인 나에게 호감을 갖는다면 그는 더 이상 좋은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차이는 게 당연한, 차여야 아름다운 짝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만 실연은 실연이었다. 나는 실연을 당해서 슬펐다.
선릉역에서 건대입구역까지 20분, 20분 내내 나는 정신없이 울었다. 순환선인 2호선은 늘 승객이 많다. 많은 사람이 힐끔거리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냥 울었다. 모른 척 하세요, 청춘이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