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아프리카>
만화를 이야기하는 에세이에서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한번 해보겠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고르라면 후보가 너무 많아 도저히 고를 수 없지만, 영화라면 17살 때부터 줄곧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처음 본 건 학교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나는 ‘영화 논술’ 부였다. 사실 정확한 부 이름이 기억나진 않는데, 영화를 보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부서였고 ‘영화’를 보는데도 입부 경쟁률이 높지 않아 굼뜬 나에게까지 차례가 온 걸 보면 아마 ‘논술’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붙어있었겠지, 싶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두 남성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다. 당연히 이에 따른 논술 주제는 ‘동성애 찬반’이었다. 나는 ‘찬성’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타인이 찬·반 따위로 간섭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논제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못해서 ’ 찬성’으로 글을 썼다. 수업이 끝나고 이어지는 쉬는 시간까지 할애할 정도로 꽤 열심히 썼다. 원고지를 제출하며 보니, 분량을 전부 채워서 낸 사람은 나 하나였다. 텅텅 빈 원고지를 낸 학우들은 정규 수업이 아니어서 열의가 없었던 건지, 주제에 대한 의견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다음 주 특별활동 수업엔 출석하지 못했다. 급체를 하는 바람에 점심때쯤 조퇴했기 때문이다. 내 급체는 하늘이 도우신 거였다. 선생님이 그날 수업에서 공개적으로 내 글을 읽었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주제에 나 혼자 진지하게 열변하는 글을 낸 것이 머쓱하던 참이었다. 친구들 앞에서 읽히는 것까지 듣고 있어야 했다면 부끄러워 죽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글이 선생님의 마음에는 꼭 든 모양이었다. 첨삭 원고를 받으러 갔을 때, 선생님은 나를 아주 반겨 주셨다.
"오, 네가 알시구나. 그래, 알시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어떠한 배움에는 '미디어'의 힘이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 '소수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라고 수십 번 가르치기보다 소수자를 다루는 미디어를 한 개 보여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나를 가르친 위대한 선생님은 [호텔 아프리카]라는 네 권의 만화책이다.
[호텔 아프리카]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엘비스’는 시골 출신의 백인 엄마 ‘아델’과 밤무대 가수인 흑인 아빠 ‘트란’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났다. 엘비스를 출산하기도 전에 사고로 트란을 잃은 아델은 고향 유타주 사막으로 돌아와 낡은 집을 개조해 엄마와 함께 호텔을 운영한다. 관광지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도로와 가까운 것도 아닌 허름한 호텔엔 세상으로부터 숨어든, 또는 달아나는 중인 상처받은 사람들만 찾아 온다.
아마 선생님께서 '논술'에 '영화'를 접목한 것도 미디어의 강력한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만 부작용은, 학생들이 별로 진지하지 못했다. 대충 졸다, 놀다 때우고 가는 시간 정도로 여기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만족하셨을까, 이 수업 덕분에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외국인, 유색인종, 장애인, 가난뱅이, 혼혈, 시골뜨기, 부랑자, 결손가정, 성 소수자 등 호텔 아프리카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의 비주류에 속한다. 엘비스 가족은 처음엔 그들 모두를 이해하진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호텔에 묵는 동안 각자의 사연을 알게 되고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면서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금은 버릇없고 맹랑한 꼬맹이였던 엘비스는 호텔 아프리카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겪으며 더없이 온화하고 사려 깊은 어른으로 자란다.
나는 선생님을 '마이클잭슨 쌤'으로 기억한다. 성함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벌써 17년 전의 인연인 까닭이다. '마이클잭슨'은 불손하게도 나 혼자 몰래 선생님께 붙인 별명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선생님은 늘 새카만 선글라스를 썼다. 마르고 하얀 데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단박에 마이클잭슨이 떠올랐다.
마이클잭슨 쌤은 사고로 눈을 다쳐 시력이 굉장히 약하다며, 선글라스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거라고 했다.
수업 첫날, 원고에 글은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쓸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시력으론 종이 원고의 깨알 같은 글씨를 읽을 수 없어, 원고를 스캔하여 큰 컴퓨터 화면에 한 글자씩 띄워놓고 읽기 때문에 연필 글씨는 흐릿해서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첫 수업, 첫 소개 만에 바로 선생님이 좋아졌다. 선생님은 원고 하나를 읽는 데에도 굉장히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에서 논술에 대한 열정과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느껴져서 멋있었다. 그리고 '볼펜 사용'을 필수적인 규칙으로 정하고 통보해도 됐을 텐데 정중히 '부탁'을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좋은 어른’이구나. 그녀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을지 기대가 커지는 첫 만남이었다.
어른이 된 엘비스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영화를 배운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함께 태우는 끈끈한 친구들도 생기고, 그 외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갖는다. 엘비스의 주변에는 여전히 소수자가 많다. 사람들이 숨어드는 외지고 허름한 호텔 아프리카가 아니라, 대도시 뉴욕인데도.
유타주 사막의 호텔 아프리카든, 대도시 뉴욕이든 소수자는 똑같이 존재했다. 같은 비율로. 내가 몰랐을 뿐, 어딘가 분명히 존재한다.
엘비스의 어린 시절, 호텔 아프리카의 첫 손님이자 장기 투숙자였던 인디언 ‘지요’는 엘비스의 곁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엘비스에게 세상과 자연을 가르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주었다. 엘비스는 어른이 되어서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 혐오와 배척이 아닌 인정과 존중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사람은 모두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지위와 정체성이 모두 주류일 수는 없으니까. 누구든 한 부분쯤은 비주류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위치, 시기에 따라서도 주류와 비주류는 바뀐다.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 비주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인 것이다.
지금 당장 안전한 주류에 속해있다고 그것을 무기로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마이클잭슨 쌤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소수자에 대한 미디어를 보여주고 소수자에 대한 논술을 쓰게 했을 것이다.
마이클잭슨 쌤은 시각 장애 때문에 주요 과목을 담당하지 못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특별활동만 맡았다. 하지만 나는 국영수보다 중요한, 인간으로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은 그녀가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벌써 17년이 흘렀으니, 이제 학교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교육도 학생도 선생도 전부 변했을 테다.
그래서 간혹, 아직도 선생님은 학교에 계실지, 이제는 어떤 내용의 수업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고 계실지, 상상해 보곤 한다.
아마 지금도,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