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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Sep 01. 2023

‘갑질’ 없는 우정, 이게 장르가 판타지가 아니라고요?

<너와 나>


만화카페에 가면 늘 첫 번째로 찾는 책이 있다홋타 키이치의 [너와 나]이다카페 안에 들어서자마자 [너와 나]의 신권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신권이 있다면 신권을없다면 이미 봤던 마지막 권을 다시 한번 꺼내서 읽는다나름의 워밍업’ 루틴으로메인 디시를 먹기 전에 슴슴한 수프를 마시는 것과 같다     


[너와 나]는 탈력계(빼앗을奪 )’, ‘수면계’ 만화라는 별명이 있다이 만화를 보고 있으면 힘이 쭉 빠지고 잠이 올 정도로 잔잔하다는 뜻이다만화의 내용은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같이 자라 온 네 명의 고등학생 유타유키카나메슈운의 일상과 우정을 보여주는 청춘 학원물로, 특별한 갈등이나 악역 없이 평화로운 에피소드들이 반복된다.     


큰 갈등이 없다 보니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전부 비슷한 느낌이어서 '지루하다'는 불호의 평가도 많지만나는 이 만화가 가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다정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아주 좋아한다주인공 네 사람 말고도 만화에 등장하는 학교 친구들선생님들이웃 사람들 전부가 선하고 포용적이다누군가 실수를 하고 말썽을 부려도그 사정을 헤아려주고 다정히 보듬어준다그러면 말썽을 부렸던 사람도 금방 뉘우치고 착한 아이로 바뀐다선의는 반드시 선의로 돌아온다.

모두가 착하기만 한 아름다운 세상어쩌면 장르가 판타지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선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돌아오지만은 않는다는 걸 나는 고등학교 1학년에 알았다. 나는 아직도 꽤 자주 그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이따 아침에 시내로 나와. 어차피 너 할 일 없잖아?"     


H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새벽이었다. 무례한 얘기였지만 대충 넘기고 알겠다 답했다. H는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었다. 일명 츤데레(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싫은 척 틱틱거리는 성격) 타입으로, 일부러 위악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나는 그것을 그녀의 고유한 사춘기 증세 정도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H는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엉뚱한 행동을 일삼기로 학교에 소문난 사차원이었다. 나는 그 자유로움과 개성이 마음에 들어 처음 보자마자 그 애가 좋아졌다. 나의 적극적인 관심 표현으로 H와 나는 몇 주 만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로맨틱해서 소소한 이벤트를 해 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집 방향이 전혀 다른데도 집까지 데려다주거나, 그 애가 좋아한다고 말한 간식거리들을 기억해 뒀다가 서프라이즈로 선물해주곤 했다. 그때마다 H는 고맙다는 게 아니라, 츤데레 농담이라며 되려 트집을 잡아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 말투가 우스꽝스러워서 전혀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런 장난이 반복되면서 점점 정도를 잃고 무례해졌는데 나는 그것을 제때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새벽의 전화로 불려 나온 나를 H는 멋대로 끌고 다녔다. '어딜 가는 거냐, 뭘 하러 가는 거냐, ' 물어도 '넌 알 필요 없다'라고 일갈하고 꽤 먼 거리를 영문도 모른 채 빙빙 돌아 걷게 했다. 한참 걷다 지쳐 들어간 카페에선 앉자마자 제 용돈은 따로 쓸데가 있으니 '네가 돈을 다 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각자의 음료를 하나씩 시키고 조각 케이크도 맛별로 하나씩, 세 개를 시켰다. 나는 단것을 싫어해서 케이크를 먹지 않을 거라고, 혼자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시키라고 했지만 H는 세 개를 먹겠다고 우겼다. 나는 평소보다도 훨씬 제멋대로 구는 H에게 슬슬 화가 나고 있었다.      


케이크가 나오자 H는 세 개의 케이크를 순서대로 딱 한입씩 떠먹었다.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보란 듯이 아주 천천히 세 번의 포크질을 하고는 손을 딱 내려놓았다.     


“나 다 먹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네가 먹어 없애. 얼른!”     


그제야 나는 H가 나를 일부러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무례를 어디까지 받아 주는지. 내가 시키는 거라면 너는 잔말 없이 다 따라야 해,라는 오만한 태도로. 내 인생 처음으로 당하는 ‘갑질’이었다.      


참아 줄 이유가 있는가?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일어나 남은 음식들을 쟁반째로 가져다 버렸다. 이렇게 친구를 하대하는 장난을 치는 녀석과는 절연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오는데 뒤따라 나온 H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얘기를 하며 들러붙었다. 방금의 상황에 내 기분이 상한 것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H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내 갈 길만 갔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아예 서로 싫어하는 사이에서 못되게 구는 것은 자주 봐온 일이지만, 서로를 친구로 여기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서 이렇게 일부러 상대를 괴롭히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겪었고, 처음 알았다. 

사회적으로 상하 서열이 있는 관계에서 사용하는 ‘갑질’이라는 단어를, 근래엔 사적인 관계에 적용하여 ‘상대를 덜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굴며 감정적으로 괴롭히는 것 또한 ‘갑질’이라 표현한다. 당시엔 이런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H의 행동을 명쾌하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렴풋이 H가 우리의 관계에서 본인을 더 우위로 생각하고 나를 얕잡아 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H를 선의로 대했는데, H는 나를 만만히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었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도 전부 ‘선한’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사실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정’과 ‘의리’를 최고 가치로 두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년만화들을 너무 많이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다. 만화와 현실의 괴리는 어린 오타쿠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에서도 H를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H는 계속 내 주위를 기웃거리고 내 친구들에게 괜히 말을 거는 등 내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직접 사과하기엔 자존심이 상하는지 끝내 사과는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바뀐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누구 하나 화해를 종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에 대한 H의 무례를 진작 알아보고 과하다고 생각했다 말했다. 그렇게 시시하게 H와의 우정은 끝이 났다.     


 

2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연재되었던 [너와 나]는 작년 7, 17권을 마지막으로 완결됐다더 이상 신작이 나오지 않을 테니앞으로는 만화카페에 가면 이미 본 것을 다시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다그래도 나는 아마 앞으로 몇 년간은 질리지도 않고 보고 또 볼 것이다


이 잠이 올 정도로 밍숭맹숭한 만화가 나는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생각해봤다이유는[너와 나]의 세계 속 평화로움이 내가 꿈꾸던 최고의 이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유키유타카나메슈운현실에 있을 법하지만실제론 찾기 힘든 착하고 귀여운 친구들오랜 세월 지켜봐 와서 그럴까이제는 이 녀석들이 내 동창 같다물론 나이는 나 혼자 먹었지만

서로에 대한 다정함이 넘치는 주인공들과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싸우지도 상처 주지도 않는 사랑 가득한 평화현실과는 다르지만그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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