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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May 11. 2023

‘나대는’ 친구를 오래 사귀는 방법

<시니컬 오렌지>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읽었던 만화책이 뭐였을까. 엄마 손에 붙들려 찾아간 치과의 대기실에 비치된 만화잡지였던 것 같기도 하고, 두 살 터울의 오빠가 빌려온 근육질의 남자들이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소년만화였던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는 어린이 교육용 과학만화였을지도 모른다.


반면 가장 처음으로 '직접 빌렸던' 만화책은 잊히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난다. 윤지운 작가의 [시니컬 오렌지], 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미소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표지의 9권짜리 한국 순정 만화다. 빌리게 된 경위 또한 명확히 기억난다.

 


중1 봄. 새 학기의 어느 날, 나는 방과 후 J를 따라 생전 처음 만화방에 가봤다. 만화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부산하게 책을 훑는 J와 다르게, 나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만화책으로 가득 찬 책장들 앞에서 좀체 한 권도 뽑아들지 못했다. 그냥 이 낯선 곳에서 얼른 나가고 싶어서 J가 빨리 책을 고르기만 바랐다. 하지만 J가 네다섯 권의 책을 고르는 데는 거의 40분이 걸렸다. 지쳐 바닥에 쭈그려 앉은 내 빈 손을 본 J가 여태 뭐 했냐며 바로 책 한 권을 꺼내 들려주었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이거 읽어.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읽어봐야 할 명작이야.”

 

고집 없고 수동적인 나는 내용도 묻지 않고 그대로 그 책을 빌렸다, J의 이름으로. 반납은 그냥 학교에서 자기에게 주면 된다고 J가 선심 쓰며 말했다. 나는 ‘그럼 이제 가도 되나’ 하고 생각했다.

 


시니컬 오렌지의 주인공 황혜민은 엄청난 미소녀로 그녀의 외모로 인한 편견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동성에게는 질투를 받아 왕따 당하고 이성들은 그녀의 외모만 칭송할 뿐 그녀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다. 외롭고 상처받은 혜민은 유일한 친구인 사촌오빠 신비에게만 의존하며 타인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자기 인생에 신비만 있어준다면 친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혜민에게 어느 날 바람둥이로 소문난 장마하가 다가온다.



빌려 읽은 시니컬 오렌지 1권은 너무 재미있었다. 2권을 빌리러 만화방에 다시 가고 싶었다. 다시 갈 생각이 없었기에 만화방까지 가는 길을 제대로 기억해놓지 않았던 게 후회됐다. J에게 말해야 할까, 나는 고민했다.

사실 나는 J가 불편했다. 스스럼없고 약간 제멋대로인 J와 더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너무 소심해서 J가 방과 후 같이 집에 가자고 해도, 같이 만화방에 가자고 해도 거절하질 못했다. 억지로 질질 끌려다니면서 속으론 '내가 미적지근하게 굴면 알아채겠지, 혼자 알아서 나가떨어지겠지', 기대할 따름이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내가 같이 만화방에 가자고 부탁해야 할 상황이었다. 으으. 어쩌지? 에이, 모르겠다!



“우와, 네 그림 머리숱 엄청 많다!”

 

J가 나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입학 첫날 5교시가 끝날 때까지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혼자 그림만 그리고 있던 나한테 J가 말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 ‘너무 잘 그린다’는 칭찬만 들었는데, 칭찬도 아닌 ‘머리숱이 많다’라는 묘한 구체적인 평가는 놀림같이 느껴졌다. 나는 불쾌함을 표시하기 위해 대꾸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그림만 계속 그렸다. 하지만 J는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나 너 그리는 거 좀 봐도 돼?’하면서 한참을 내 그림을 보다 갔다.

 


“너네 집 깍두기 맛있다! 근데 왜 깍두기가 따뜻해?”

 

J가 나한테 두 번째로 건 말이었다. 입학 둘째 날 점심시간에 J는 내 자리에 와서 도시락을 펼쳤다. 같이 먹어도 되냐는 말에 싫단 말을 못 해서 가만히 있었고 네 김치 좀 먹어도 되냐는 말에도 싫단 말을 못 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남의 반찬을 먹어놓고선 저런 소리를 했다. 왜 따뜻하겠니, 보온 도시락 통에 들어 있어서지. 얘 정말 별로다. 어제 같이 밥 먹던 친구들 두고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J는 입학식 첫날 아침부터 새로 만난 친구들과 껴안고 뛰어다니면서 놀던 애였다. 엄청난 친화력! 내성적인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들에 약간의 부러움과 거부감을 느꼈다. 나는 저렇게 소란스럽고 나대는 애하고는 엮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J뿐만 아니라 딱히 누구와도 친해질 생각이 없었다.


이 무렵 나는 사춘기가 이상하게 와서 요상한 중2병을 앓았다. 타인과 잘 지내보려는 시도들이 전부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표해줘도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해 매년 새 학기마다 새 친구들을 만나는 걸 힘들어했는데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삐딱한 마음을 가졌다. 친구 없어도 괜찮아! 혼자 학교 다니지 뭐! 흥!

그 굳게 걸어 잠근 마음에 첫날부터 마구 노크를 해대는 J가 정말 거슬리고 싫었다.

 

하지만 만화가 읽고 싶었다. 나는 결국 J와 함께 다시 한번 만화방에 갔다. 이번에는 길도 제대로 외웠다. 회원으로 가입해서 2권부터는 내 이름으로 대여했다. J는 신이 나서 시니컬 오렌지를 다 읽은 후에는 무슨 만화를 읽어야 하는지 줄줄 읊어주었다.

 


바람둥이라는 소문 때문에 혜민은 마하를 경계했지만, 알고 보니 마하는 친화력 있고 사람을 좋아하는 따듯한 사람이었다. 혜민은 마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나간다. 처음 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법, 말을 거는 타이밍, 대화 주제, 좋게 거절하는 법, 호감을 받았을 때 응답하는 법 등. 무엇보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오빠라는 방패 뒤에 숨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쌓은 벽을 스스로 허문다.


 

다음 권만 빌리고 나면 J랑은 이제 같이 안 다닐 생각이었는데. 그런 다짐은 나머지 8권을 읽는 사이에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시니컬 오렌지는 과연 명작이었다. 한 권 한 권 완독할 때마다 난 뜨거운 감상을 쏟아낼 곳이 필요했다. 주옥같은 대사들을 읊으며 감탄과 공감을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 대상은 당연히 J가 되었다. J는 흥분해서 떠벌거리는 나를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암, 그럼. 알지, 네 맘. 그치, 명작이지.' 이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난 그 뒤로도 몇십 아니, 몇백 번은 J와 함께 만화방에 갔다. J에게 추천작을 소개받고 반대로 내가 소개해 주기도 했다. 서로의 추천작을 읽고 나면 심각하게 토론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비평가가 따로 없었다. 내 추천작을 J가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그만큼 뿌듯한 건 없었다.

 

바뀐 건 J와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친구를 사귀려 애쓰는 짓은 한심하다던 중2병이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친구를 사귀자고 애쓰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다 보니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모여들었다.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 직접 만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나는 초대 회장을 맡았다. 회장이라니, 어지간히 나댔다. J가 나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멀리하겠다던 과거가 너무 염치없을 일이었다.

 


14살에 처음 만난 J와는 34살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단짝으로 지낸다. 숱한 날들을 함께 보냈고 많은 사건 사고를 함께 겪었다. 이제는 만화 말고도 공유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우리가 만화로 친해졌다는 사실도 까먹을 때가 많다. 서른 즈음의 언젠가 J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널 싫어했던 걸 알았느냐고.

 

“아니? 몰랐지. 내가 그때는 그런 쪽으로 눈치가 엄청 없었어. 나중에 나이 먹으면서 저절로 깨달았어. 아, 알시가 그때 나를 엄청 싫어했구나, 이렇게.”

 

J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나는 어린 J가 눈치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다, 네가 눈치가 없어서. 우리가 만화를 좋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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