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면서 마주하는 나의 이야기...
나의 홀든은 안녕한가?
청소년 소설, 성장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청소년, 학생 그리고 우리집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어떠해야한다.', 혹은 '어떠하다'라는 결론을 나도 모르게 내리고 있었다.
사람의 습관이란 무섭다는 걸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왜 그 속에 나는 없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왜 자꾸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만 소설 속 인물들을 대한 것일까?'
은연 중에 나는 '나'를 외면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보면 조인성의 눈에만 보이는 도경수가 있다. 도경수는 실제 인물이 아니고 조인성의 눈에만 보이는 조인성의 어린 시절이다. 조인성은 그를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실존 인물처럼 대한다. 항상 곁에 있지만 자신인 줄 모르고...
마지막 장면은 항상 맨발로 뛰어다니는 도경수에게 발을 씻겨주고 운동화를 씻겨주면서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제대로 자신을 만나고 보듬어 주고 인정해 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도 차무희는 또다른 자신 도라미(?)를 외면하고, 만나고, 떠나보낸다. 물론 도라미는 알고 보니 차무희가 아닌 차무희가 저 밑에 숨겨두고 감춰뒀던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얼마 전 아들에게 이런 이야길 들려줬더니 피터 팬이 살고 있는 네버랜드의 그림자 이야기를 했다. 그래 맞다. 네버랜드에서는 그림자가 따로 움직인다.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는 홀든에게만 집중했었다.
홀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시선, 모든 것들이 그 시기에는 그럴 수 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성장이 일어난다는 입장으로 홀든을 대견하게 쳐다보았었다. 그것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는 홀든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를 만나는 경험을 했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숨겨뒀던 정확히 말하면 내가 외면했던 나도 만나고, 위로해줘야 하는 나도 만나고, 응원해 줘야 하는 나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조금 편안했다. 나를 만나는 것이...
사춘기를 무난하게 보냈다고, 그렇게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도 누구나 홀든의 시절은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인식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그리고 내가 아는 홀든과 나의 가족이 아는 나의 홀든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어쩌면 가장 크게 인정하게 된 부분이 이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경험이었지만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장면이 많다. 나의 유년 시절과 오빠의 유년 시절에는...그래서 나의 행복이 오빠에게는 아픔으로 기억되던 시절도 많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몰랐던 나의 홀든 시절도 만나기도 했다.
'나의 홀든은 안녕한가?'...
지금까지는 안녕한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안녕한 면만을 보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잘 들여다보고 잘 만나려고 하고 있으니 '안녕해 지려고 하는 단계' 쯤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제법 많은 피비가 있고, 안톨리니 부부가 있고, 가족이 있다. 그들이 들려주는 나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들을 외면하기 보다는 이제는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계,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단계인 것 같다고나 해야할까?
나도 나만의 호밀밭이 있다. 맘껏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은 호밀밭이 있고, 절벽이 있어도 한없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호밀밭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나의 호밀밭에서 파수꾼도 되었다가, 그 속에서 한없이 즐기는 주인공도 되었다가...그렇게 나만의 호밀밭을 만들고,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50에 만난 <호밀밭의 파수꾼>은 나의 호밀밭으로 갈 수 있는 이정표 같은 소설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