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가 내게 건 시간의 마법
배우 이정은은 나에게 중년의 얼굴로 처음 나타났다.
1970년생, 현재 나이 54세라고 기술되는 그녀는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했다. 그 후로도 많은 작품들에 출연했지만, 대학시절 뮤지컬 빨래도 분명 보았던 것 같지만, 문화적 소양이 한참 모자란 내가 그녀를 제대로 발견한 건 남들 다 아는 미스터 선샤인, 기생충 같은 작품이었으니까.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나이 있는, 오랜 내공이 쌓인 '인생을 아는' 현명한 중년의 얼굴로 나에게 처음 나타났다.
귀엽고 푸근한 얼굴로 함안댁처럼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다가도, 기생충의 문광 같은 기묘한 이미지를 풍기기도 하고. 로스쿨에서는 지적인 교수로, 또 소년심판에서는 김혜수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우리들의 블루수의 은희로, 다양한 매력으로 화면을 지배하는 그녀. 이제는 너무나도 사랑받는 국민 배우가 되어 매년 좋은 작품들을 들려주고 있다. 이정은의 40대, 이정은의 50대, 이정은의 60대, 이정은의 70대 80대도 모두 보고 싶지만, 그녀의 10대 20대는 도무지 볼 수 없기에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이건 사실 뒤늦게 발견된 모든 명품배우들에 대한 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를 보게 되었다. 모두 16부작으로 얼마 전 8월 4일 인기리에 막을 내린 이 작품은, 배우 이정은과 배우 정은지가 하나의 인물로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면 아침 출근시간부터 저녁 6-7시 즈음까지는 50대 시니어 인턴 이정은의 얼굴이고, 밤이 되면 새벽까지 29살 취준생 정은지의 얼굴로 산다고 할까. 어쨌든 과거로 돌아간 건 아니니까 타임슬립은 아니지만, 나는 이 드라마에서 타임슬립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판타지를 느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본 이 드라마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기승전결말까지 훌륭한 명품 드라마로 내게 남았다.
SNL로 유명한 배우 김아영의 유머 넘치면서도 사랑스러운 무공해 연기(나는 김아영이 연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해). 단역에서 시작해 스토브리그 빈센조 등을 지나며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는 배우 윤병희의 찰진 연기. 요즘 대세 엄마 솔이엄마 아니고 억척스럽고도 정 많은 뜨거운 엄마 정영주. 착한 아빠 전문에서 DP의 최종빌런까지 성장한 배우 정석용도. 훈훈한 아이돌 고원도, 1분도 안돼 나를 울게 하는 메인롤 정은지도. 나쁜데 착한 메인 남주 최진혁의 몰입도 높은 연기도 모두 좋았지만, (나머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요기까지만).
그중에서도 이 드라마에게 가장 고마운 점은 배우 이정은의 스물아홉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거다. 뒤늦은 취업에 눈물 흘리는 이정은, 강철체력으로 암벽등반하는 이정은, 신들린 타이핑으로 업무만렙 쳐내는 이정은, 걸그룹처럼 미스터츄 춤추는 이정은, 천방지축 김아영과 찐친 먹는 이정은, 엄마(정영주)한테 등짝맞고 혼나는 이정은, 사랑에 빠진 이정은, 질투하는 이정은, 애처럼 우는 이정은, 효도하는 이정은, 이별을 슬퍼하는 이정은...
그건 억지 흉내도 아니고 어린 척도 아니고 배우 이정은의 지나간 진짜 시간이었다. 드라마가 펼쳐지는 16회 내내 그 모든 지난 이정은들이 만화경처럼 색색으로 풍성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 귀엽고도 사려 깊은 판타지는, 내가 보지 못했던 20대의 이정은도 30대의 이정은도 빈틈없이 꽉 채워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서로 앞에 선 50대의 이정은이 20대의 정은지에게 남긴 말이 있다. "지금 까지처럼만 살아가면 된다, 내가 한 건 결국 네가 해낸 거잖아. 너는 이미 선물을 갖고 있었다. 뒤늦게 깨달아서 그렇지." 뒤늦게 알게 된 이정은이라는 배우, 하지만 원래부터 소중했던 이정은이라는 배우가 앞으로도 더 눈부신 선물 같은 장면들을 안겨주기를. 100살까지 사랑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기를. 그게 이 드라마가 내게 건 시간의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