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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라일락 Aug 15. 2024

나에게도 비밀정원이 있다

오직 우리에게만 있는 장소, 집


인간에게 장소란 무엇일까? 단지 물리적으로 내가 있는 공간일까? 사전에 의하면 장소란 인간의 애착과 의식이 더해진 개념이라고 한다. 애착과 의식이 더해진 나만의 장소. 나에게도 그런 장소들이 있다.

스마트폰 속 가로 세로 1cm 남짓한 지도앱 아이콘을 터치하자, 현 위치를 중심으로 지역정보가 담긴 지도가 화면 가득 펼쳐진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지도 위에 새겨진 수백 개의 별. 가고 싶어 저장해 두었거나, 실제로 다녀온 곳을 동선별로 보기 좋게 기록한 것이다. 수많은 나의 좋았던 장소들을 기억하는 별표들로 지도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오랫동안 지도를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별들의 궤적은 내 지난 역사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살던 동네, 약속했던 맛집과 카페들, 취향저격 편집샵과 다녀온 전시장들. 그렇게 장소는 나의 애착이고 나의 취향이고, 나의 관심이며, 나의 일상, 나의 현재, 그리고 나의 인생이 되어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별표를 쳐주고 싶은 별은 따로 있다. 은하수처럼 밀집된 서울 번화가의 별들과는 다른, 나 홀로 저 멀리 동떨어진 외딴 별. 사실은 이런 별표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증표 같은 장소. 바로 나의 백운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앞으로는 푸르른 논밭과 야트막한 동네 앞산인 메론산이 있고, 뒤로는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는 단층의 농가주택들이 드문드문 들어선 그곳. 이 장소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몇 년 전 세컨드하우스로 마련한 우리 가족의 시골집이다. 처음엔 ‘서울에 집도 있는데 굳이?’ 하며 약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고집으로 마련하고 가꿔낸 이 집은, 남은 우리 가족에게도 사랑하는 장소이자,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위로가 되고 있다.

나의 장소 백운에는, 아무것도 없다. 힙한 카페도 놀거리도 쇼핑할 곳도 극장도 없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열어도 아무것도 없다. 대신에 있다.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은 깨끗한 하늘이 있다. 밤이면 또렷한 별들이 반딧불이처럼 하늘 가득 수놓아지는 명장면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수 하나하나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올린 수공예 돌담이 있다. 백일홍, 작약, 크로버, 장미, 마당 가득 피어나는 제철 꽃들이 있다.

고구마, 상추, 깻잎, 옥수수,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싱그러운 먹거리들이 있다. 앞집에서 키우는 사과나무와, 맞은편집에서 키우는 초당옥수수 가득한 풍경. 비가 오면 산허리에 낮게 걸쳐지는 하얀 구름이 운해를 이루는 순간이 있다. 백지처럼 순수한 자연을 가진 백운만이 줄 수 있는 순간. 그건 어떤 핫플레이스도 대신할 수 없다.


바쁜 삶과는 단절된 공간. 다른 어떤 것도 없고 우리 가족과, 사랑하는 강아지들만이 있는 그 공간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곳에선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애써 증명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차려입거나 애써 꾸밀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의 편들 만이 있는 나의 장소.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충만해진다.  

언젠가 돌아가게 될 나의 장소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을 준다. 바쁘게 달리며 살아가다가 주말이면 찾아와 잠시 쉼표처럼 쉬어갈 수 있는 나의 장소. 그 장소가 있기에, 나는 어떤 공간을 헤매더라도, 어떤 힘든 날들이 다가와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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