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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라일락 Aug 11. 2024

어쩌면 내가 빌런이었을지도 몰라

그다지 착한 주인공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스파이더맨도 모두가 등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헐크도 처음엔 자기 안의 힘과 분노를 다룰 줄 몰랐다. 아이언맨도 돈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빌런이 아닌 히어로로 성장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상대적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는 얄팍하다. 누군가에겐 빌런이 누군가에겐 한없이 착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그걸 생각하면, 세상에 100% 빌런이기만 한 빌런은 사실 없는 것 같다. 내 인생의 빌런들도 그래왔다. 어떤 순간엔 천사의 얼굴로, 다른 순간엔 빌런의 얼굴로.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어떤 선배는 자기가 일부러 악역을 자처한다고 말했다. 뭐 도대체 어디가 나쁜 거야? 싶을 정도로 나에겐 좋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선배를 꽤나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어떤 선배는 몇 년 동안 멘토처럼 생각하고 지냈다. 하지만 뜬금없는 순간 공격적인 언행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알고 보니 알코올이 문제였다). 누군가는 양아치처럼 수준낮은 말을 앞에서 대놓고 하더니, 자기가 날 얼마나 소중히 아끼고 위하는지 모르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인간적 정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내 기준엔 범법에 가까운 행동으로 대리수치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다음 날 또 좋은 사람 코스프레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좋은 사람 코스프레. 그건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현명한 누군가는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 정상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라고 조언하기도 하던데, 나는 반대로 일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단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일단 최악은 아니고, 일단 뒤통수는 치지 않을 것이며, 일단 진심은 통할 것이고, 일단 서로를 배려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인간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실망할 때 타격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 좋은 사람이지만 - 알아갈수록 그 사람이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일단은 싫어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노력해 본다. 스스로를 부지런히 가스라이팅해가면서. 헌신하다 헌신짝은 부전공이다. 앗 이 정도면 내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건 내가 "착한" 혹은 "적어도 정상인" 주인공이라는 전제 하에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빌런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사실은 내가 정말 빌런이었고, 빌런이 된 내가 처단당한 공명정대한 이야기였을까? 내가 틀리고 그 사람이 맞는 거였을까? 내가 너무 힘들 때 종종 착한 후배들이 '몸 쓰는 건 제가 할게요' 라며 힘이 되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빌런이었던 것 같다. 괜한 공명감에 꼰대노릇을 했던 친구들에겐 지금도 미안하다. 사실 그렇게 뭐라 할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도저히 비위 맞춰주기 힘들었던 분들에게도 나는 빌런이었던 것 같다. 살기 위해 꿈틀 하는 순간에도 나는 눈치 없는 빌런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절대적인 선역이라는 생각. 그 생각은 실은 정말로 오만하다. 나는 짐짓 착한 얼굴로 온 세상에 민폐를 끼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왔고, 자신의 결정이 공익이라는 오만한 사람들도 여럿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마녀가 나였던 적도 있다. 내가 절대적으로 맞다는, 내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그런 사람들의 반대편에 내가 서게 되면 꼼짝없이 내가 빌런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가? 그걸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힘 있는 사람이, 나와 친한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 맞다고 느낄 뿐이다. 다들 자기가 절대적인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릴 적,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내가 정말 빌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친구가 자꾸 친하게 지내라고 할 때, 나름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이 얼마나 불편한 존재인지 질서 정연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난 그 사람 좋던데? 너랑 안 좋다고 나까지 안 좋아야 돼?"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쿨한 친구다. 하지만 당시에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섭섭해했고, 결국 작은 틈이 큰 구멍이 되어 그 친구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엔 그 친구도 내가 생각한 그 빌런과 크게 틀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쪼잔하게도 기뻤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실제로 문제가 생긴 빌런이 맞았다!!!! )


 나도 누군가의 빌런들과 친하게 지낸다. 나의 빌런도 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은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자신만의 이유로 행동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곤 했다. 나는 웬만해선 사람을 쉽게 싫어하지 않는데. 내가 싫어하는 정도면 진짜로 큰 문제가 있는 건데. 내가 정상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렇게 나만의 좁은 세계에서 저 사람은 빌런이야 저 사람은 우리 편이야 그렇게 경계를 긋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정답이 아닌데.


 영화에서 빌런을 소름 끼치게 잘 소화해 내 호평을 받는 배우들을 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빌런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그에겐 다 이유가 있어요. 그래 모든 빌런에겐 이유가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를 그렇게까지 몰고 가게 된 압박, 이해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다만 모든 나쁜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고 빌런이 되지는 않듯이, 범죄자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똑같은 상황에서도 분명 더 좋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있다. 아무리 파괴하려 해도 빌런이 되지 않는 사람도 결국 존재하고야 마는 것이다.


 지금 나는 하나하나 새로운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새롭게 쌓아갈 앞으로의 내 인생엔, 더 이상 새롭게 만나는 빌런들은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 또한 최대한 빌런 되기를 피해볼 것이다. (물론 그게 뜻대로 쉽게 되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빌런 되지 않기를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최악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히어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좋은 쪽의 인간으로, 그게 내 남은 인간 생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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