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의 별

by 김간목

집앞 슈퍼에서 콜라 한 병을 사서 돌아오는, 이제 완전히 겨울밤이었다. 해가 진 저녁 7시, 패딩을 부시럭거리며 돌아오는데, 어두침침한 집앞 중국집에서 그 집 딸내미가 숙제를 하고 있었다. 보통 그 집에서 찹수이나 로 메인을 시켰을 때 픽업오더를 쌓아놓는 간이 테이블을 책상으로 삼아서. 나는 저 테이블이 얼마나 덜컹거리는지 알고 있다.


옐프나 리뷰 사이트에선 평점이 그닥 좋진 않고, 실제로 맛도 메뉴 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나는 저 집을 좋아한다. 잘 하는 요리는 잘 하기도 하거니와, 추가로 어딘가 내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 그렇다. 예컨대 픽업오더로 주문한 음식을 받아올 때면, 저 집에선 갈색 종이가방 바닥에다가 딱 맞게 오린 상자 조각을 하나 받쳐준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배려가 있는 집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상자 조각을 누가, 언제 오렸을까를 생각해본 뒤론 달리 보이게 됐다. 아침부터 밤까지 배달 또한 직접 해가며 영업을 하시던데.


예전에 서부 살 적에, 학교 앞엔 일식집이 있었다. 그 집은 고추장 양념 회덮밥이 맛있는, 한국인 부부가 하는 일식집이었지만 그건 한인들끼리의 비밀이었다. 미국에 살다보면 그런 일들이 눈에 종종 띈다. 이제는 한국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얘기겠지만, 아메리칸 드림이니 인종의 용광로니 해도,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 팔아서 먹고 살기엔 영 팍팍하다.


왜 이런 얘길 갑자기 하냐면, 저 중국집도 그렇기 때문이다. 한번은 마파두부가 너무 먹고 싶어 사다먹은 적이 있었는데, 사천요리들이 메뉴에 길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도 밍밍한 괴작이었다. 그런 실망스러운 일들이 몇 번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 집에서 이것저것 시켜먹었던 이유는 저 집에서 처음으로 사다먹은 싱가폴식 볶음 쌀국수가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소한 서프라이즈를 즐기는 편이라, 이것저것 시켜보게 됐는데, 한 번은 중국요리를 잘 모르는 필자가 튀김옷을 폭신하게 부풀린 탕수육을 받아보고는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언젠가 한 번, 중국식 오믈렛까지 먹어보고 나서야 주인 아저씨 출신 성분을 조금이나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저 집 아저씨도 결국 자기가 잘 하는 음식은 메뉴판 전면에 놓지 못하고 사천 요리나 미국식 중화요리를 주로 팔며 별점을 짜게 받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쓰다 보니 주인 아저씨랑 말 섞어본 적 한 번이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게 좀 무례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어머니께선 어렸을 때 연구의가 꿈이셨지만 약사로 지내고 계신다. 글을 읽고 쓰는 것도 남달리 좋아하신다. 그렇다고 당신께서 약국 일을 싫어하시냐 하면은 그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잠시 쉬면서 동생과 내 입시 때문에 집에 계시는 동안 늘 찰랑찰랑하게 차 있는 스트레스를 역으로 우리 남매가 뒤집어 써야만 했으니. 또한, 업무 환경도 좋아하신다. 소위 말하는 "인싸"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한 촌장 기질이 있으셔서 어머니 약국은 몇 번을 옮겨가더라도 그 동네의 복덕방이 되곤 했다. 박카스 한 병 사러 와선 1시간 넘게 미주알 고주알 별 것도 아닌 얘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약국 일을 좋아하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런 이유로, 내가 나의 부족함을 증오하며 세상을 예단하고 마는 바로 그런 이유로, 주인 아저씨나 그 집 형편을 맘대로 불완전하다 여긴 것이 부끄러워졌다. 가령 혹자는 어두침침한 중식당 덜컹거리는 간이 테이블에서 엄마 아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숙제를 하고 있는 그 집 딸내미를 짠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기억은 다르다. 어머니 약국 한 켠에 플라스틱 상을 놓고 동생과 앉아서 학습지를 풀었던 유년, 약국에 약장도 있고 한약도 달이던 시절, 마음 속 그 광경에서 피어오르는 지린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한약 달이는 냄새와, 또 절구 소리에 맞춰 피어오르던 가루약 냄새. 발포 비타민을 사러 오던 동네 아이들과 영지천이나 박카스를 사러 오던 어른들. 하나 같이 좋게만 남은, 나의 행복한 기억들이다.


마음 속에서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면, 나는 집앞 중국집 그 가게, 중화의 별이라는 상호를 생각한다. 빨리도 어두워지는 이국의 겨울밤, 어두침침한 매일의 전장에서 기름과 수증기를 별처럼 튀기며 불 앞에서 얼굴이 벌개지는 아저씨를 상상한다. 갈색 종이봉투 안에 내일 들어갈 상자 조각을 오리고 있을 누군가와, 누구 한 사람의 소망보다도 땀방울이 무수하고 많을 그 부지런한 광경 안에서 덜컹거리는 간이 테이블에 기대어 잠자코 숙제를 하는 한 소녀를 생각한다. 화(華)의 별이라니, 이름이 참 좋다. 내일부터 미국은 추수감사절 연휴인데, 집앞 허름한 중국집이 휴무를 안 하신다면 나는 내일이고 모레고 아저씨 잘 하시는 음식을 무어라도 사다 먹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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