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는 우상

by 김간목

내가 어렸을 땐 일반 가정집 학생이 해외축구 중계를 지금처럼 쉽게 접할 순 없었다. 때마침 브라질의 삼바축구가 월드컵에서 적잖은 충격을 줬었고, 따라서 드리블이라 하면 (짧은 영상들을 몇 개 나마 접할 수 있었던) 호나우두나 데니우손이 유명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에 반골이었던 사춘기의 나는, '가장 좋은 드리블러에겐 커다란 페인트가 필요 없다'는 헛다리 무용론 개똥철학을 내세웠다. 그런 맥락에서 유용한 건 라이언 긱스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리블러도 라이언 긱스였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쯤 흘러 메시의 데뷔 시즌 경기를 하나 볼 수 있었다. 지울리와 후반전에 교체되어 오른쪽 윙으로 들어가는 경기였는데, 이제 갓 데뷔하는 선수가 긱스처럼 드리블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생생하다. 그 땐 '쟤는 드리블 하나 만으로도 먹고 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어린 나이에 저렇게 내실 있게 드리블하는 선수가 있다니, 내 이상을 공유하는 것 같아 기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땐 이렇게 축구화 신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선수가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동 시기 맨유에선 호날두가 제 나이 또래 드리블러들이 으레 그렇듯 기술을 뽐내면서 차세대 드리블러라고 칭송 받고 있었다. 나의 개똥 같은 미학엔 반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모습도 나는 감동적이었다. 드리블러나 하드워커들의 데뷔 시즌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라운드 안에서 자기 자리를 쟁취하려는 그들의 노력 워낙 역동적이라,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눈에 쉽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축구를 많이 보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라 함은 첫째로 삶이 바빠졌고, 둘째론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별 거 아닌 골키퍼의 롱 스로우를 보고 '분위기 이상하다'고 느낀 뒤 어김 없이 그라운드 반대쪽에서 골이 터지게 되었을 때, 혹은 파울이나 경고 퇴장을 힐끗 보고 느낌 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식겁해서 나의 취미로부터 도망쳤다.


그 뒤로 또 몇 년이 지나, 바쁜 삶을 살다가 돌아보니 10여 년 동안 축구는 메타가 많이도 바뀌었고 스타 선수도 몇 번이나 물갈이가 되었다. 그리고 메시는 내가 그 플레이를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수준 높은 투쟁은 알아보기 힘들다. 어느새 노장의 반열에 오른 그가 발전하려는 방향도 나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긱스의 뒤를 이어 나의 이상을 그라운드에 보여줄 예정이었던 데뷔 시즌의 그 루키가 이제 그것을 아득히 넘어가버린 나머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나는 조금 삐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 리그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후 메시의 플레이를 몇 번 찾아보게 되었다. 약간 감동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곳에서 나름대로 플레이의 템포와 동선을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앞서 드리블러와 하드워커의 데뷔 시즌은 내게 언제나 감동적이라고 했다. 그가 새로운 리그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 같은 감동을 내게 전해줬다. 한 사람은 제 취미조차 두려워 도망쳤는데,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이루고도 루키처럼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니.


얼마 전 어느 인터뷰에서 메시는 세계 1등의 선수가 되려고 한 적은 없었고, 그저 절대적인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도전해왔다고 밝혔다. 나는 그의 말과 새 리그에서 데뷔 시즌을 맞은 노장 루키의 노력이 합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오랜 기간 지켜본 것은 아니기에 세간의 상식 선에선 나 자신을 메시의 팬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겠지만, 정당한 자격을 갖춘 04/05시즌 메시의 옛 팬으로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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