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카네기 홀에서 랑랑 피아노 솔로 공연을 보고 왔다. 프로그램은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바흐의 골드베르크 바리에이션들. 특히 후자는 작년 이맘 때 앨범이 나왔는데, 그걸 이렇게 빨리 들어볼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
1. 곡에 대해
나는 바흐를 코롤리오프의 연주로 만났다. 굴드를 알기 전이었고, '어쩜 사람이 기계보다도 명료하고 정확하게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굴드를 알고 난 뒤, 코롤리오프를 다시 듣고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인간의 목소리를, 피아노에 실어 나타낸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흐의 작품은 내게 대체로 그런 느낌을 준다 - 음악을 통해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 스포티파이와 에어팟을 통해 들려오는 현대의 피아노 소리를, 성당에서 들리는 오르간 소리, 혹은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어 소리로 치환해보면 그 같은 인상은 더욱 강해진다. 바흐 본인이 음악을 신에게 바치는 찬미로 생각했다는 것은, 나중에 클래식 교양수업을 들으며 안 일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수백 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기도 한다.
골드베르크 바리에이션은 그런 면에서는 다소 이질적이다. 교양수업에서 들은 내용을 더듬어보면, 이 변주곡들은 본디 불면증을 앓고 있던 귀족을 위해 쓰여졌다. 신에게 바치기 위해 쓰인 바흐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이 곡은 잠들지 못하는 인간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쓰여졌다. 그래서 때때로 모차르트가 들릴 정도로 "멜랑콜리"한 이 곡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난 뒤, 바흐의 다른 곡들을 들을 때나, 혹은 바흐 인벤션을 피아노로 쳐 볼 때, 나는 바흐 아저씨에게 '이건 누구의, 어떤 목소리나 마음인가요'하고 마음 속으로 물어볼 때가 있다.
2. 랑랑의 앨범에 대해
사실 변주곡을 들어보면 저절로 등을 펴고 앉아 듣게 되기 때문에 이걸로 불면증을 달랠 수 있나 싶지만, 랑랑의 앨범엔 나름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변주곡 5번이나 12번의 경우, '이걸 이렇게 부드럽게 칠 수 있다고? 손가락이 15개인가?' 싶고, 변주곡 2번 같은 경우엔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발랄한(...) 테크닉도 구석구석에 넣어놨다.
필요할 땐 (ex. 변주곡 3번) 감정선도 진하다. 게다가 바흐의 곡들에는 종종 화들짝 놀랄 정도로 현대적인 화음이나 멜로디가 등장하는데, 그걸 호흡을 골라서 두드러지게 연주하는 것도 (ex. 7,8,11번) 귀를 잡아당긴다. 사실 많은 음잘알 여러분께서 리뷰를 많이 하셨을 테니, 필자는 이만 하고 실연 리뷰로 넘어가려고 한다.
뉴욕 가는 기차에서도 앨범을 들으며 예습을 하고 있었는데, 9번을 들을 때쯤 가을색으로 물든 갈대밭, 습지, 그리고 허드슨강 너머 오른쪽으로 저 멀리 맨하탄이 보이는, 해가 넘어가는 가을날 늦은 오후의 풍경을 낡은 기차가 천천히 지나며 삐걱대었다. 사실 기차가 여길 천천히 지난다는 건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얘기지만, 그 순간엔 무한한 평안함을 느꼈다. 바흐나 랑랑이나 부산한 사람의 마음을 어쩜 이렇게도 달랠 수 있는 것인지.
3. 실연을 듣고
리오프닝 이후 처음 찾은 카네기홀은 북적였다. 블록을 돌아야 할 정도로 길게 줄이 늘어섰고, 백신 접종 여부와 티켓을 체크한 뒤 들어갈 수 있었다.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4층이나 오르면, 예약한 발코니 석이었다. 일행이 "모 심어놓은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안 그래도 가파르고 좁은 카네기홀의 관객석이 가득 들어찼다. 오늘은 이역만리 먼 타향을 사는 중국 관객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랑랑을 기다리며시작은 슈만의 아라베스크. 사실 여기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바흐지만, 이것은 랑랑이라는 것을. 완벽한 연주를 마친 뒤 랑랑은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관객은 아마 나 포함 소수였을 것이다.
랑랑은 변주곡 30개를 논스톱으로 연주했고,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과 랑랑의 집중력 싸움이 되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관객들의 완패였다. 어떤 이는 팜플렛을 펴고 도대체 이게 몇 번 변주곡인지 알아내느라 용을 썼고, 내 앞에 앉은 이는 핸드폰으로 트위터를 보다가 진행요원에게 핸드폰 집어넣으라고 쿠사리를 먹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잠이 든 관객들도 많았는데, 사실 이건 바흐가 중간 중간에 변주곡 15번 같이, 야밤에 불면증 환자를 위해 곡을 30개나 쳐야 하는 불쌍한 연주자를 구제하기 위해 작정하고 재우려는 넘버들을 넣어놓은 탓이 크다고 본다. 사실 듣다가 자는 거야말로 제대로 된 감상법이 아닐까.
아무튼 연주의 특징이라면 "랑랑은 랑랑"이란 것이다. 앨범은 역시나 많이 절제된 편이었다. 압도적인 리듬감, 앨범 연주에서보다 더욱 크게 악기를 울려대는 왼손, 몸서리가 쳐지는 트릴, 셈여림의 롤러코스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화성. 분명히 바흐인데 자꾸 리스트가 들렸다 (좋은 의미로). 테크닉을 마구 쏟아내다가 손을 휙 털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넘버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는데, 앨범과는 다른 해석도 종종 들렸다. '이거 이렇게 로맨틱한 곡이었나?' 싶은 넘버도 몇 있었고, '행진곡이야 뭐야' 싶은 넘버도 있었다. 감성적인 넘버에선 사람 감정을 들었다 놨다 아주 쥐어짜는 통에 필자의 미간엔 쥐가 날 뻔했고... 하지만 결국 제일 인기 좋은 건 템포가 빠른 넘버들이었는데, '기껏 그랜드 피아노 갖다놓고 깨작거려서야 쓰겠냐'는 듯이 프레이징을 갖고 놀고, 음표를 마구 쏟아내는 통에 지루해 하던 관객들도 자세를 고쳐 앉고 랑랑의 손끝에 맞춰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랑랑을 다시 보게 된 건 "재우려는" 넘버들에서였다. 사람 작정하고 재우려는 음악을, 전혀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냈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폴리포니 사이에, 건반 위로 엎드리다시피 한 연주자의 고뇌가 꾹꾹 눌러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 다음 노트는 어떻게 칠 거야? 그 다음은?'이라고 눈을 감고 자문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클라비어에 대해선 어느새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흐 아저씨가 이 연주를 들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무튼 아리아 다 카포까지 마치고 나니, 관객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자던 관객들, 딴짓하던 관객들도, 마지막 몇몇 넘버들에선 이미 의자에서 등을 떼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기립박수 끝에, 앵콜 곡이 시작됐다. 앵콜 1번은 엘리제를 위하여. 불면증 환자를 위한 곡에 이어지기로는 가장 좋지 않았을까. 곡의 시작에 관객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는데, 나는 오히려 센티멘트가 이어지는 것, 그리고 사이 사이에 슈베르트가 들리는 것에 감탄했다.
앵콜 2번은 중국의 인기 가요인, "자스민 꽃"의 피아노 편곡이었다. 일행과 나는 처음엔 무슨 곡인지 몰랐지만, 중국 관객들이 탄성을 지르며 웅성대는 걸 보고 그 곡이 그들에게 갖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어린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했단다. 뉴욕에서 우리가 아리랑을 들으면 그런 느낌이겠지. 하지만 연주는 당연히(...) 빡셌다. 아니, 중국 가요에서 연타가 그렇게까지 나올 일인가.
4. 마치며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오늘 본 게 정말 인간의 손가락인가' 혹은 '냅두면 저 인간 앵콜 2곡이 아니라 밤새도록이라도 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정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음알못의 따끈따끈한 감상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음잘알의 후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