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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목 Oct 23. 2022

노튼-사이먼에서

십여 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눈이 너무너무 보고 싶을 때면 노튼-사이먼 미술관엘 가곤 했다. 그 곳엔 알프레드 시슬레의 눈 그림이 있어서,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볕 안에서도 유년 속 내 기억, 조용하던 눈 오는 아침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곤 동부로 이사를 가서, 제대 이후 처음으로 삽을 들고 눈을 치우게 되고, 뜻 없이 뉴욕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돌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왜 시슬레의 그림이 없지?"


인터넷으로 뉴욕 소재 시슬레 그림을 찾아보고 난 뒤, 그의 눈 그림이 뉴욕엔 없다는 것을 배웠다. 뉴욕에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었다.


다시 노튼-사이먼 얘기로 되돌아와서, 로댕 작품들이 늘어선 입구를 지나, 15불짜리 어른 티켓을 사고 (학생 때는 공짜였다) 오른쪽으로 돌면 17-18세기 유럽 회화들을 만난다. 나는 예술엔 문외한이지만, 이 시기의 유럽 회화들을 꽤 좋아한다. 물론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렇게 그릴 수 없겠지."


노튼-사이먼은 아주 작은 미술관이고,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 14-16세기를 다 돌아보는 데 5분, 17-18세기를 다 돌아보는 데 7분, 19세기에 5분, 20세기에 또 5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돌다 보면 다리가 아파진다. 중정에 나와 자리를 잡으면, 거기엔 조각상들이 있고, 카페가 있고, 가족들이 있고, 나처럼 다리를 쉬는 사람들이 있고, 햇빛이 있다.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오늘도 14-16세기와 17-18세기 유럽 회화들을 돌아보고, 노튼-사이먼의 중정에 앉아 다리를 쉬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 시슬레의 눈 그림을 보러 왔던 것이 지난 주의 일 같다.


지난 주에, 아니, 그러니까 5년 전 쯤에, 나는 노튼-사이먼에 왔었고, 십수 년 전에 루브르에서 봤던 귀도 레니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래서 노튼-사이먼에서도 귀도 레니의 그림을 찾았다. 귀기 서린 레니의 그림 속에선 성녀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그녀가 손목을 긋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화풍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손목을 긋고 있는 성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고, 집에 오는 길에 포스터를 사 왔다. 그 이후로 누군가 나에게 레니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색감이 선연해서 좋다고 말하곤 했지만 기실은 그의 그림 속에선 사물의 뼈들이 저마다 새하얗게 드러나는 것이 좋았다.


오늘도 들어오자마자 로댕 작품들이 늘어선 입구를 지나, 15불짜리 어른 티켓을 사고 (학생 때는 공짜였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17-18세기 유럽 회화들을 만났다. 나는 예술엔 문외한이지만, 이 시기의 유럽 회화들을 꽤 좋아하고, 특히나 귀도 레니의 그림을 좋아한다. 물론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렇게 그릴 수 없겠지."


빨갛고, 하얗고, 어둡고, 선연하고, 이따금씩 금색으로 빛나는 고통. 오늘 다시 만난 우리의 존재 양식은 내 기억보다 조금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귀도 레니의 그림 앞에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었다.


"원래 이런 창이 있었나?"


십여 년 전 그 때엔 그다지 햇볕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쩌면 내 방 포스터는 워낙 어두침침한 곳에 있어서 쓸데없이 장중함gravitas을 조금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하늘은 파랗고 높다. 자연광을 살짝 피해 앉아, 노튼-사이먼의 중정에서 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노튼-사이먼에서는 아무도 손목을 긋지 않는다


다리가 다시금 가벼워졌으니 이제 중정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이어서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가 다 지나가면, 이제 조금 이따가는 뉴욕에도 눈 오는 아침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슬레의 눈 그림을 보러 가야만 한다. 그런 존재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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