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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목 Dec 05. 2022

공허한 증명

33가 Path 트레인 옆에서

누구 소개를 받아서, 혹은 초면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오면 나는 우물쭈물하게 된다.


오늘은 뉴욕에서, 샌프란으로 이사 가는 고교 동창의 송별회를 했다. 유부남 셋과 나 하나, 우리는 음악과, 외삼촌의 죽음과, 결혼생활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참고로 나는 미혼이고 여자친구도 없다.


나의 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렇게 생생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 왜 소설이나 수필집을 내지 않느냐고 고교 친구들은 타박했다. 나의 답은 간단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1년의 반을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곤 했던 사람이, 골방에서 책만 팠던 사람이, 그것이 인생의 의의였던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과연 나르시스트는 제가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52가&3가에서, 33가&6가까지 걸어내려오며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잊어버렸고, 지하철이 30분 뒤에 있고 나는 오줌이 마려웠던 것만이 기억난다.


취미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나는 딴짓을 많이 할 뿐이다. 글쓰기도, 축구도, 음악도,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시간을 허투루, 많이 쓸 뿐이다. 그렇다면 딴짓과 취미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르시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4명이서 위스키 한 병을 비웠다. 셋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갔고, 나는 지하철 역까지 걸었다. 걷고 싶은 기분이라 말했다.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르시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누구나 로맨티스트이며 동시에 리얼리스트이다. 다만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자위를 한 뒤, 현자타임이 오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뜨는 사람과, 사달이 나기 전에 주위를 둘러본 다음, 점잖게 자리를 뜨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2개의 나르시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작별을 했다. 그러나 하던 버릇으로 헤어졌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나는 그렇기를 희망하고, 우리는 애초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 고교 동창들 사이에서라지.


나르시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겨울밤, 바람이 불지 않는, 그래서 목도리가 머쓱한, 그런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주 빛이 나는 뉴욕의 12월달 어느 밤에,


Path 트레인 역으로 가는 유리문 6개를 당겨보고서야, 나는 모두 닫혀있음을 알았다.


오줌이 마렵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을 증오한다.


그렇지? 쓰고 싶은 이야기 없이, 이 글은 쓰여졌다. 따라서 이것은 나르시즘이다. Q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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