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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저씨의 꽃집

by 김간목

뉴저지 촌동네의 한낱 저녁이었다. 해는 넘어갔는데 아직 오후의 바람이 남아있고, 운동 다녀온 허벅지가 들이쉰 숨을 다 잡아먹는 바람에 목은 끈적거리고 머리가 뜨거워,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마저 역했다.


오늘 낮중엔 옛 친구의 좋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동료의 활기찬 모습을 봤다. 내 쪽에서 나눌 좋은 소식도, 활기도 없어 미안했지만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지난 주엔 선배의 기운 없는 모습을 봤는데, 나라고 기운이 날 만한 얘기는 딱히 없어서 옛 이야기나 했다. 우리는 많은 걸 잠시 잊었다. 지지난 주엔 후배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평상심이 눈앞에서 자꾸 아른거렸다.


하여간 달이 오른쪽으로 볼록하여 창백한 저녁, 독일 차 일본 차, 미국 차들이 차례로 라이트를 켜며 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마스크를 턱까지 내려도 숨이 모자라 창을 내린 채로 어딘가의 2차선 도로를 지나는데, 퇴근길에 막혀 차가 잠시 섰다. 차도 체증, 내 숨도 체증, 갈 길 바쁜 내 마음도 체증인데 운전석 열린 창으로 꽃집이 보였다.


주말 오전이 되면 저 집 앞엔 줄이 생긴다. 베이지색 정장과 체크무늬 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오셔서 꽃 한 송이 사 가시는 백발의 신사, 내외가 손을 꼭 잡고 편한 차림으로 오셔서는 깐깐하게 꽃다발을 꾸려가시는 사모님,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왔다가 심부름 사 가시는 올블랙 러닝복 핏이 멋진 아저씨, 그리고 꽃 냄새에 신이 난 강아지. 가정집 1층을 터서 대충 만들었다가 얼렁뚱땅 그 곳에 뿌리를 내린 것 같은 나이 든 가게에,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갖은 세월을 들여와서, 가게 전체는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사 가는 향기로운 마음과 활기로 가득 찬다.



금요일 저녁, 찻길에서 꽃집을 보며, 그 광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단풍이 군데군데 불타는 동부의 가을, 마트엔 커다란 호박이 들어와 쌓이는 계절, 로버트 아저씨네 꽃집도 호박으로 인테리어를 해놓았다. 원래도 노란색 조명을 해놓은 작은 꽃집의 내부가, 어둑어둑하니 문 닫을 시간에 호박색과 황금빛으로 넘치는 것 같다. 저 안에는 이름도 다 모르는 꽃들이 물에 담겨 갖가지 은은한 향기로 공간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선반 위엔 꽃 냄새가 포장 밖으로 새어나오는 립밤이나 비누 따위가 널려 있고, 꽃 진열장과 선반을 지나면, 향기 한 가운데 위치한 카운터에서 로버트 아저씨가 "Hey~!"라고 외치며 우리가 동네 친구라도 되는 양 맞아줄 것이다.


문득 저 곳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일의 활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마치는 꽃집. 향기나 조명, 호박 같은 것들은 어디에나 예쁘게 있지만, 찾는 사람들과 반기는 사람들의 작은 사회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꽃을 사러 오시면 친밀한 시간은 공짜입니다'라니, 줄이 서지는 게 당연하다. 시간으로 값을 치르는 인연, 리뷰만 보고 지나쳐선 살 수 없을 시간.


오로지 소식을 들을 뿐인 사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마트에 콜라를 사러 가는 사람, 이렇다 할 좋은 소식이 없는 어떤 한 사람은, 퇴근이나 콜라는 잠시 잊고 차를 근처에 대었다. 천천히 걸어, 꽃집 전경을 찍어왔다. 퇴근하기도 나와 같고, 조용하기도 나와 같은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다시 천천히 걸어 차로 돌아오는 길, 풀벌레가 가을 밤을 울고, 숨은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내일은 뭐라도 사겠단 핑계로 로버트 아저씨네에 들러보마는 마음이, 어느덧 깜깜하게 지워진 시간 한 켠에서, 조용히 황금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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