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빈 마음으로 써야지."
시를 읽고 쓰기 시작했던 시기에 대학교 선배가 해준 말이다. 읽은 것도 겪은 것도 없이, 무작정 마종기, 황동규, 백석의 껍데기를 본인 한미한 감상에 덕지덕지 붙여가며 쓰던 나를 아껴 하던 말이었다.
십수 년이 지나서도 나는 부족하고, 유치한 괴로움 뿐이고, 쓸 테마도 없어서, 여전히 빈 글 위에 펜대를 놀렸다가 지운다. 남 모르게 쓰면서도 펜을 몇 번이나 꺾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쓰게 할까. 물론 언어가 흘러넘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읽음이 부족한 게 신경 쓰여서 한 며칠 홀린 듯이 읽어대다가, 온갖 표현과 상징, 은유가 머릿속을 뒤덮는 바람에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하루 온 저녁 펜을 잡고 쓰며 머릿속을 게워내야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배설의 행위였다. 독자가 없었으므로, 최대한의 의미는 문자의 나열(string). 그럼 독자를 염두에 두고서도, 빈 마음으로 쓸 수는 있을까. 그런 고민은 꽤 오래 되었고, 아직도 내 안에 뚜렷한 답은 없다.
주절주절 썼지만, 책꽂이에서 시집을 전부 꺼내다가 몇 권 넘겨보면 몇몇 시인들에게서 그에 대한 해법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나타난다. 왜일까 잠시 생각을 해봤는데, 마음에 꽉 들어찬 개인의 희노애락보다도 그들 시인에게는 더 중요한, 표현하고 싶은 바가, 누군가의 심상에 언어를 넘어 떠올려 주고 싶은 그 어떤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드래곤볼의 미스터 포포도 말하지 않던가 - 마음을 비우는 거랑 생각을 않는 건 다른 거라고. 허리띠가 편한 사람이 허리를 잊듯, 어쩌면 빈 마음으로 쓰려면 마음을 잊어야 하는 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날에, 쪼여 맨 마음을 잠시 풀고 신세 한탄을 해보았다. 그런 날이라서인지, 오늘은 오규원의 시집 제목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