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뒤, 2년에 한 번은 꼭 이사를 다녔다. 그러면서 짐은 점점 줄어갔다. 한 때는 떠나는 사람들의 짐을 모두 맡아놓으면서 집이 꽉 찼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1년을 채 못 갔다.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올 땐, 10년의 짐이 옷가방 2개, 그리고 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모두 들어갔다.
모든 소비는 따라서 "버릴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집에서 커피를 끓일 수 있어야 한다고 치자. 이사할 때 가져가게 될 테니,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부피가 커서는 안 된다. 그러면 모든 커피머신들이 고려대상에서 제외되고, 남는 건 프렌치 프레스나 모카포트, 혹은 인스턴트가 된다. 실제로 필자가 집에서 써본 3가지가 이와 같다. 요즘은 거의 인스턴트만 마신다.
소파를 또 한 가지 예로 들어보자. 예전에 소파를 한 번 중고로 들였다가, 이사할 때쯤 버리자니 아직 쓸 만하길래 중고로 되팔아 처분한 적이 있다. 사는 사람과 접선 시간을 맞춰야 하고, 그에 맞게 일과 시간에 잠시 나와야 하고, 사는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차가 없으면 내가 소파를 옮겨야 하고, 아무튼 대단히 귀찮았다. 그래서 동부로 이사를 와서는 아주 빈백을 들였다. 이 다음에 이사를 갈 땐 뜯어서 버리고 가려고.
한 번은 또, 새로 들어간 집에 냉장고가 없었다. 황당했지만 중고 거래 사이트 Craigslist를 몇 주 정도 지켜보다가 소형 냉장고 2개를 들여와서 붙여놓고 2년 동안 썼다. 집주인이 내심 이 인간이 냉장고를 들여놨다가 두고 나가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같아 괘씸하기도 했지만, 가정용 냉장고들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 몇 주 동안이나 팔리지 않고 계속 리스팅이 돼 있었는 데 반해, 소형 냉장고들은 1주일 내로 전부 팔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사를 나오면서 소형 냉장고 2개를 잽싸게 처분할 수 있어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최근 2년, 코로나 락다운 기간 동안 이 방향으로 또 다른 발전이 있었는데, 바로 집에 갇혀서 대부분의 물품을 아마존에서 택배로 시키자니, 택배 상자들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매번 택배 상자들을 펴서 내버리다가, 문득 아까운 생각이 든 나는 택배 상자들을 가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책상이나 의자로 쓸 수는 없지만, 간단한 책꽂이라든가, 책이나 필통을 올려놓을 사이드 테이블, 혹은 스킨로션 정도 대충 올려놓을 화장대로 쓰기엔 차고도 남았다. 이제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갈 땐 이삿짐 상자로 쓰거나, 남는 택배 상자들은 버리고 가면 될 일이다.
그래서 지금 집은 무슨 창고처럼 보이지만, 스무 살 초반에는 이것저것 실험하느라 도리어 꽉꽉 채워 살았었다. 벽면을 채우는 커다란 수납장을 샀다가 크고 무겁고 아무튼 불편해서 이사할 때 쌍욕을 퍼부은 적도 있었고, 책꽂이 2개를 옮기려니 자가용 조수석에도 일손이 못 타는 바람에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비싼 돈 주고 파파산을 샀는데, 생각보다 내구성이 별로라서 후회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 모든 시행착오 끝에, 책상, 의자, 침대, 피아노 외엔 이삿짐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 건 이제 집에 들여놓지도 않게 됐다.
주변엔 이제 직장에서 이사비 지원 받아 그냥 사람 쓰고 마는 경우들이 늘었는데, 이미 버릇이 이렇게 들어버린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을 쓰더라도, 짐이 적으면 아무래도 이사가 금방, 싸게 끝날 거 아닌가? 이사하는 날은 일 안 하나? 그리고 아무리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사 준비에 드는 시간이나 신경은 결국 이삿짐의 양에 적어도 비례하는 게 아닌가? 짐이 워낙 적으면, 이사 가는 집에 뭐 들어갈 자리가 없거나 뭐가 안 맞아서 처분해야 하는 경우도 줄지 않을까? 하다 못해 엘리베이터가 작아서 가구를 분해했다 조립해야 하는 경우라도 좀 줄지 않을까?
무엇이 더 합리적이란 이야길 하려는 게 아니라, 내 딴엔 이런 궁상맞은 방식이 편하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누군가는 평소에 그냥 남들처럼 필요하면 사고 하면서 미리 걱정을 사서 하지 않고 편히 지내다가, 이사 갈 때만 하루이틀 신경 쓰는 걸 선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 뭘 사는 데 신경 안 쓰고, 나중에 뭘 파는 데 신경 안 쓰고, 이사 당일날 신경 덜 쓰고, 하여간 그런 게 편하도록 길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버리기 좋은 걸 따져 사는 웃지 못할 타입의 소비자가 되었다. 꽃병은 다 마신 와인병이면 된다. 책은 주로 전자책으로 산다. 누군가는 설레지 않으면 내다 버리라고 까지 말했다지만, 나는 버릴 수 없으면 설레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입때껏 내가 해온 일을 별 거 아니라며 쓰레기통에 처박고 다음 일 하러 옮겨가는 것도, 내가 이사를 다니는 방식을 닮았다. 인스턴트 커피가루가 새카만 만나처럼 보이는 오늘 밤, 이 글을 쓰다 문득 아라빅 라운지가 내 드림하우스의 거실 인테리어였단 걸 떠올리곤 금새 즐거워졌다. 내년엔 또 이사를 가야 하는 나는 참 모범적인 유목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