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사람

by 김간목

그를 다시 만난 건 한국에서였다. 서로 떠돌아다니는 처지에, 한국에서 다시 만나다니 기묘한 인연이었다. 처음에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가 베이지 색 떡볶이 코트를 입고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던 것만은 기억난다. 새하얀 피부에 주근깨가 가득한 그는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에 비하자면 늘 내 사정이 더 나았다. 반성을 좀 하자면, 나는 가장 혜택 받은 환경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정말로 웃기는 노릇은, 온실 속 화초 우리 동기들을 내가 열심히 얕잡아 보았던 것이었다. 한 분야의 서러브레드들이 본인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고생하는 거라든가, 어렵고 의미 있는 일만을 가려 쫓다가 깡통을 차게 되는 거라든가, 반대로 쉽고 결과가 빨리 나오는 일만을 받아 하다가 시야가 좁아지는 거라든가, 하여간 늘어놓고 보니 괜한 꼬투리를 많이도 잡았다. 나와서 독립을 하려고 보니, 그제서야 나도 온실 속 화초였던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튼 동기들 중 에이스들이 줄줄이 때려치고, 중간쯤 하던 동기가 좋은 곳에 직장을 얻더니 별 것도 아닌 걸로 약을 팔아 명성을 얻는 것을 보며, 고상한 이 판도 결국엔 평범한 대가리들이 목청을 드높이는 도떼기 시장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정말로 비상한 대가리들은 다르다. 그들은 남들이 시장바닥에 자리 얻으려고, 혹은 이제 막 자리를 얻어서 호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동안, 이미 본인들 상가 건물 다 올리고 누구한테 세를 줄지 고민을 하고 있다.


얘기가 좀 돌았는데, 하여간 그는 이런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어딘가 늘 조심스러웠던 그의 태도는, 그의 소지품마저 검소하게 보이게 했다. 우리 쪽 인사들이란 워낙에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 쓸 데 없이 당당한 태도가 종종 그들이 걸친 싸구려나 무지 또한도 속칭 "쌔삥"처럼 빛나 보이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의 언행이나 분위기에는 "소탈"과 "단정"이라는 말들이 딱이었다. 남의 의견은 끝까지 들으며 속단하지 않고, 질문을 할 때에도 본인이 이해한 바를 먼저 밝힌 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공손하고 정확히 전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은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 초저녁이었고, 주택가의 도로 변이었고, 바람이 불고 있었고, 창백한 피부에 주근깨가 많은 그는, 뿔테 안경과 베이지 색 떡볶이 코트를 걸치고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 속에서 그는 어딘가 쓸쓸하고 슬퍼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서정이란! 온실 속 화초들이 제 벌레 먹은 잎사귀들을 거창하게 흔들어대는 데에 질린 내 눈에, 그는 바람 부는 언덕에 홀로 서서 흔들리는 어린 단풍나무처럼 보였다.


아무튼 직업적으로도 그는 견실한 사람이었다. 별 것도 아닌 결과물로 약을 팔지도 않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유의미한 네트워킹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도떼기 시장 한 가운데서 자리 펴고 말 없이 불상을 깎는 사람처럼, 어렵든 쉽든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소매를 걷어부친다. 겸손, 끈기, 동기부여, 조용한 자신감, 하여간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겸손하지도 않고, 끈기도 없고, 동기부여도 오락가락하고, 자신의 성취를 놓곤 이 따위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며 쓰레기통에 처박기 일쑤인, 하여간 감이나 열정만으로 주먹구구 헤쳐 지나온 내게 부족한 모든 것들이 효율 좋게 짜여져 있으니, 내 눈에 그의 정갈한 모습이 좋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가 최근에 좋은 자리를 마침내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팔짱을 낀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사진 속 그 웃음이 너무나 어색해서 나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여태까지 자기 페이스로, 자기 생각을 따라 걸어왔으니, 저 자리에 팔짱 끼고 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 하필 그가 가는 길은 나와는 견해가 상반되는 길이라 그와 나의 세계선이 앞으로 만나긴 힘들겠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인생과 일에 대한 그의 태도를 나는 존경한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그 가을 풍경 속 뿔테 안경과 베이지 색 떡볶이 코트를 걸친, 약간은 슬픈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큰 사람들이 작은 일들을 요란스레 해대는 동안, 작은 사람이 말 없이 큰 일을 이루어가는 광경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한여름 속 반팔 티에 팔짱을 낀 그의 어색한 웃음은, 내게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승리선언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이 거대한 오답을 쌓고 있다고 보지만, 당신이 인생을 사는 방식은 그 누구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오답의 산이라도 언제든 남은 퍼즐 한 조각이 딱 들어맞으면 한 순간에 정답의 산으로 거듭나기도 하는 것이 이 바닥인 만큼, 나는 당신의 삽질을 응원한다 (사실 모든 삽질은 다 신성하지만, 당신의 그것은 내 눈에 특히 더 아름답다는 그 말을 하기가 조금 쑥스러워 이 수필은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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