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막내딸(16)

엄마와 동거

by 옥이

객지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일을 해나가던 나는 어느새 엄마 같이 있으니 응석받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려서도 하지 않았던 응석을 아프다는 핑계로 하고 있었다. 엄마가 모든 것을 다 내게 맞추어 주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해주어야 딸이 밥을 먹고 잘 지낼 수 있을까 동네 마실을 다니셔도 색다른 반찬이 있으면 얻어 오셨고 앓고 있는 병에 좋다고 하면 구하고 없으면 사다가도 해 주셨다. 무엇이든지 다 해서 먹이려고 엄마는 늘 애를 쓰셨다.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는 늘 나를 앉게 하시고 잠을 자게 해 주셨다. 방 하나가 이 칸 방이었는데 반을 나누어서 위쪽에는 창고 같이 사용을 했다. 아무리 불을 때도 그곳까지는 데워지지 않았고 웃풍도 심하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땔감을 감당하기가 힘이 들어서였다. 아랫목은 항상 이불로 덮어 놓고 군불은 자기 전에 한 번 때고 새벽에 해도 뜨기 전에 아랫목이 식어서 웅크리고 잘 때면 다시 엄마는 나가셔서 군불을 때셨다.

하루는 시내 약국에 가서 약을 사 갖고 온 날이었다. 집에 오니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 동네 가실만한 곳을 집집마다 다 찾아다녔다. 그렇게 몇 집을 찾아다닌 끝에 엄마를 만났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볼벤소리로 어머니께 말을 했다. 내가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는 나가지 마시고 집에 꼭 계시라고 했던 것이다. 엄마가 나를 두고 도망을 가신 것도 아니었는데 엄마가 옆에 안 계시면 내가 더 아픈 것 같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불안하고 괜히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어머니께 그렇게 말을 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밤낮으로 라디오만 듣기에는 지루했다. 그래서 가끔 보고 싶을 때면 엄마를 앞장 세워서 친한 언니네로 보러 다녔다. 이곳은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를 다녔어도 졸업을 못해서 친구들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었다. 10년 정도 떨어져서 연락도 없이 살다가 내가 아프다고 내려온 내 고향인데 그런데 친구들은 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얼굴과 이름을 안다고 만날 수 있는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길에서라도 만나면 서먹서먹해서 피해 다니는 그런 사이었다. 날마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을 몰래 방 창문에 숨어서 보고 있었다. 물론 형편이 안 좋아서 못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엄마는 알고 계셨다. 나는 다니지 못해서 창피한 것도 있었다. 안 볼 때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었는데 막상 볼 수 있게 되었는데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가 심부름을 시킬 때는 친구들과 마주치게 될까 봐 싫어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침에 운동을 시키시는 일이었다. 매일 집에서만 있으면 안 된다고 아침 일찍 맑은 공기를 쐐야 건강에 좋다고 아침이면 뒷동산에 올라가서 운동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엄마가 내게 유일하게 시키시는 일이었다. 그래서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로하고 또 내 몸을 위해서 안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힘이 들어서 천천히 걸어 다녔다. 뒷동산에 올라가면 아산만(현재 평택호) 다리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멀리 바다도 보이는 것이 막혀 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 가던 것이 심심하면 하루에 몇 번씩 가게 되었다. 나 혼자라면 그렇게 못할 것이었다. 이번에는 엄마대신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 혼자서 심심해할 까봐 구해다 주신 하얀 색깔의 강아지였고 이름은 메리라고 지었다. 강아지가 크니 제법 친구가 되어 갔다. 산에 갈 때는 약간 오르막 길이어서 천천히 걸어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메리가 먼저 가면서 나 오기를 기다리다가 가까이 가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내가 오나 안 오나 뒤를 쳐다보면서 산에를 올랐고 내려올 때는 약간 내리막 길이어서 갈 때 하고는 다르게 뛰어서 내려왔다. 가뿐 숨을 몰아서 올 때면 엄마는 그것도 걱정이 되어서 말씀하셨다. 운동도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골집에서 잘 적응하고 지내고 있었다. 병도 어느 정도 호전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지정해 놓고 병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서 어디 가서 확인을 하고 약을 타서 먹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어느 기관에 가면 약을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매번 똑같은 약이었다. 나는 2차 약을 먹어야 하는데 기관에서 주는 약은 처음부터 1차 약이었다. 나하고 맞지 않는 약이어서 그때부터 약값이 비싸도 약국에서 약을 사다가 먹었다. 그렇게 약만 먹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한 번씩 확인을 해야 하는데 병원을 어디로 가야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처음 보았던 서울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가 공주 병원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싫다고 했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저씨 하고 둘이서 어떻게 가냐고 했다. 그 재서야 아저씨 사정 이야기를 하셨다. 아저씨도 오랫동안 그 병을 앓고 있었는데 거기 가서 약 먹고 낳았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저씨는 항상 얼굴도 하얗고 손에 힘도 하나도 없어서 수전증처럼 떨었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동안 평생 일도 안 하셨다. 아저씨도 환자시지만 우리에게는 잘해주셨다. 아저씨는 공주병원이 결핵은 제일 잘 본다고 하시면서 엄마도 가기를 권했다. 내가 몰라서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가 주신 것이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공주 가는 버스를 탔을 때는 꼬불꼬불 산 비탈길에 밤나무들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얼마나 달려갔는지 모른다. 공주에 도착해서 병원을 찾아가고 진찰을 하고 검사 결과를 보고 나서야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고 아저씨께 툴툴거렸던 것을 후회했다. 갈 때는 불안해서 아저씨가 묻는 말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는데 올 때는 나 스스로 수다를 떨면서 왔다. 아저씨는 엄마가 차비에 보태 쓰시라고 주시는 돈도 받지 않으시고 자비로 다 지불하셨다. 차비 병원비 점심 값까지 돈이 어디 있냐고 그걸로 애 맛있는 거 사주라고 하셨단다. 엄마는 아저씨게 늘 고마워하셨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랬다. 내가 벌어 온 돈도 엄마가 벌으신 것도 내 약값과 생활비로 다 써버린 것이었다. 벌지는 않고 곶감 빼먹듯 쓰기만 하니 바닥이 들어 난 것이었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가 작은 오빠 직장엘 찾아갔다. 약값이 없어서 오빠가 번 돈을 내가 맡긴 것처럼 약값에 쓴다고 엄마가 찾으러 가신 것이었다. 가시는 엄마 등 뒤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다음에 병 다 나아서 돈 벌면 꼭 갚는다고 말해 줘 엄마 알았지!' 그 이후 다른 것은 안 하고 오빠가 보태준 돈으로는 약만 사 먹으려고 아껴서 썼고 떨어지면 또 오빠한테 갔었다.


(오빠는 칠십이 다 되고 내가 육십이 넘었어도 이때 내가 했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교통사고로 힘들어도 지나가는 말로 '너 그때 돈 벌어서 갚는다고 했으니까 갚아라'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빠는 참 착하시고 누나 동생들을 끔찍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머니와 막내딸(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