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막내딸(22)

열여덟 일기의 한 자락

by 옥이

이제 모두가 떠나간 쓸쓸한 집이었다. 내일이면 이모님도 나도 다 가고 나면 집안은 더욱 텅 비고 큰 일치르고 일거리도 많이 생길 텐데 엄마 혼자 계시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걱정이 되었지만 매일 집에만 있는 나를 위해서 엄마는 이번엔 이모님 댁에 가서 놀다 오라고 하셨다. 내가 싫다고 하니 이모님 댁 이사도 갔으니 집도 알아둘 겸 따라갔다 오라고 하셨다. 엄마가 그리 말씀을 하시니 또 안 갈 수도 없었다. 엄마랑 집에 있는 것도 좋지만 이제 혼자서 다니는 버릇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모님 따라서 안양 이모님 댁으로 왔다. 우리 집과는 반대로 가족들이 많았다. 이모부님과 언니 오빠들 다 같이 나를 반겨주었다. 혼자 계신 엄마도 잊은 채 오랜만에 왔다고 이종언니가 데리고 다니면서 시내구경도 시켜주고 유명한 안양삼원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여주고 시골에 있을 때는 할 것이 없었는데 그래도 안양에 오니 구경할 것도 많고 혼자가 아니라 언니랑 다니니 더 재미있었다.

그런 가운데 집에 내려갈 날은 아직 멀었는데 며칠을 보내고 나니 집이 그립고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올라올 때 미리 엄마 생신 때 내려가기로 약속하고 올라간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가겠다고 말을 못 하고 이모님 댁에서 크리스마스와 한 해를 넘겼다.


그때 쓴 일기를 이곳에 조금 담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언제나 떠오르는 별들을 보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늘에 먹구름이 떠가는 뭉게구름도 그때 보았지

하얀 눈 내리는 밤 온 누리에 하얗게 덮인 겨울 풍경도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이름 모를 불빛도 한 밤의 고요함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발자국 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불빛이 식어가는 도시의 밤 풍경 속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나의 마음에 찡하게 내려 안는다.

한 밤의 함박눈이 예뻐 보였는지 밉다고 하던 앙상한 나뭇가지도 눈 꽃송이에 쌓여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고요 속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허전한 마음을 이끌고 어린 시절로 잠들게 한다. 한쌍의 새처럼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 들판을 따라 어디든지 떠나가고만 싶은 소녀의 작은 마음 이제 누구를 기다리며 사랑하며 아쉬움 속에서 지내야 할 우리들 지금은 호젓한 밤하늘을 생각하지만 얼마 안 가서 우정의 항아리 속에서 꽃 피우리라 꿈을 찾아서 정을 찾아서 옛 친구를 찾아서.


보내려 하지 않아도 오늘은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내일이 와닿는다.

어둠은 또다시 무거운 대지를 호흡하며 여운의 창을 닫아버리고 많은 역사를 남긴 하루가 또 이렇게 가고 있다 생각하며 허전한 마음으로 일기 속에 오늘을 반성해 본다. 이 시간 복잡한 하루가 깊은 잠에 잠들고 차가운 바람만이 이따금 스치고 지나갈 때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앙상한 마음은 갈 곳을 잊어버린 채 작은 창을 열고 있노라니 불현듯 쓸쓸함을 느끼는 밤이랍니다.

81년도 마지막 날 이 밤이 가고 나면 밝은 새해아침이 산등허리에 피어오르겠지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남는 것은 메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청춘의 뒷장도 메마른 탓인지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하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여운을 남기고 떠나가는 한 많은 슬픔들

넓은 길목길 무심히 쏠리는 한 등의 가로등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미소 짓게 하는 환한 밤

꽉 찬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텅 빈 가슴 밤바람이 싸늘한 탓인지 더욱 외로움을 느낀다.

밤하늘의 잔 별도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시커먼 먹구름 곧 비라도 내릴 듯이 차가운 세찬 바람

이들도 아침이면 다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빈 바닥뿐이겠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 뜻깊은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지나간 일들은 일기 속에 묶어버리고 앞으로의 새 삶의 약속하고

지금쯤 홀로 계신 우리 엄마 앞으로 더욱더 건강하시며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셨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바래도 될까? 81년이여 안녕. 82년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빌면서...


나는 이때 무엇이 쓸쓸하고 외로웠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았다. 내가 자주 아파서 집이 가난에 배우지 못해서 아니면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작 외롭고 쓸쓸할 때는 이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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