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이 지나면
이번에는 글을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마음의 갈등이 생겨서였다. 나를 내보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끝은 맺고 싶어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게 되었다.
구정도 며칠 남지 않았다. 구정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몸도 예전처럼 좋아졌고 완치 판정을 받고 6개월이 되어서 확인했을 때도 이상이 없고 깨끗해졌다고 했다. 앞으로 관리를 잘하면 문제는 없고 잘 먹고 쉬면 재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의사 선생님이 시킨다고 그대로 따라서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삶인 것 같았다. 정말 선생님 말씀처럼 이번에는 내 몸도 재발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충분히 약을 많이 먹었고 많이 쉬었고 무엇보다 엄마가 간호를 잘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엄마를 도와 드리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더 있다가 나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빠언니들이 엄마는 도와 드려도 나까지 있어서 도와주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동안 아파서 도움을 받은 것도 미안한 일인 데는 데 또 그러는 것은 나도 싫었다.
엄마와 단둘이 있게 되니 다시 심심해지게 시작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친구처럼 가지고 듣고 있었던 오래된 라디오도 고장이 났다. 고장 난 라디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생각이 났다. 한 동네로 시집간 언니는 신혼살림에 시부모님 시동생과 또 돌봐주고 있는 아이들까지 있어서 집에 자주 놀러 오지를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핑계를 삼아 가지러 갈까 생각을 했다. 놀러 간다고 갔다가도 매번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밑에서 있다가 그냥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라디오를 준다고 하니 마음을 굳게 먹고 갔었다. 집은 한동네에 있어서 찾지 않아서 좋았다. 언니네 시댁은 시아버님이 동네 이발관을 운영하고 계셨다. 나도 몇 번가서 단발머리로 깎은 적이 있었다. 이발관이라고 해도 이곳에서는 머리를 자르는 것은 남녀 가리지 않고 다 되었다. 그리고 자주 가지 않은 것은 같은 반 남자 친구가 있어서다. 친구였을 때도 사돈이 되었을 때도 그리 자주 만나거나 부딪치는 일도 없었고 또 내가 전학 가서 졸업을 안 해서 그런지 괜히 창피했다. 언니네를 갔을 때 언니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언니네는 나무로 된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부엌과 안방이 나란히 있었고 오른쪽으로 이발관과 창고가 있었고 그 옆으로 쪽방이 하나 더 있었다. 이발관 현관은 또 따로 있었다. 안 체와 가게는 서로 다 연결이 되어 있었고 마치 미로처럼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복잡했다. 옛날 시골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 내어 달아서 그런 것 같았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또 문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언니네 방문이 있었다. 그냥 안쪽에서 보면 광으로 가는 문인가 아니면 밖으로 나가는 뒷문인가 할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방에는 자게 장롱과 티브이가 있었고 방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별체처럼 되어 있어서 때리고 싸워도 안쪽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방 창문에다가 대고 언니를 불렀고 형부가 대문으로 나왔다. 언니 방을 구경하고 놀고 있는데 언니시동생 친구가 들어왔다. 어색했지만 낯설지 않아서 괜찮았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과자도 먹고 있었는데 언니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나와 있을 때는 장난치는 일도 웃을 일도 없었는데 언니는 형부와 시동생과 장난도 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다. 나 하고는 늘 떨어져 지내서인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또 시집식구들과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이 한편으로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조금은 화가 났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 추운 날씨에 동생이 간다고 하는데 바래다주지도 않았고 혼자서 밤길을 가게 했다는 것이 잊히지 않았다. 만약에 엄마가 없었으면 나는 얼마나 더 슬펐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두운 동네길을 마구 뛰어서 집으로 왔다. 그럴 때마다 동네 개들이 떼창으로 짖어댔다. 헐떡거리는 나를 보고 엄마가 물으셨다. "왜 숨차게 뛰어오냐고" 하시면서 "라디오는" 하고 물으셨다.
내가 무서워서 마구 뛰어 왔다고 하니 언니가 안 바래다줬냐고 물으셔서 나는 그 틈을 타서 언니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일러 주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 밤길에 혼자 보내서 뛰어오게 했다고 나무라셨다. 엄마가 옆에서 내역성을 들어주니 얼마나 좋은지 방금 전 상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뛰지 말라고 걱정이 되어서 타이르셨다. 결국 라디오는 갖고 오지 못했다. 언니와 형부한테 라디오를 가지러 왔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눈치만 보다가 그냥 온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여기저기 엄마와 언니가 알아본 끝에 공장이 아닌 식구가 많지 않은 가정집을 구했다. 엄마 역시 사람 많은 공장도 안 되고 가족이 많은 집도 안 된다고 하셨다. 힘든 일도 못하고 공장은 공기도 안 좋고 야근도 하면 안 되고 몸이 피곤하면 또 안 좋을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어디에서건 돈 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더 나은 곳으로 보내는 것이 엄마 입장에서는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는 일이었다.
구정이 다가오니 나는 속으로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었고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이런 시간들이 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날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엄마와 함께 지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