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님의 생활
한바탕 신고식을 거하게 치르고 다시는 다른 곳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할머님이 연세가 드셔서 잘 못 둘 수도 있고 휴지에 싸서 놓았으니 청소하다가 쓰레기로 버려졌다면 어쩔뻔했나 그랬다면 더 큰일이고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그래도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안 나왔으면 어떻게 있지도 못하고 평생 도둑으로 오해받고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있고나서부터 할머니는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진지를 드실 때도 할머님이 먼저 드시고 나면 나는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 밥을 먹었었는데 할머니와 같이 겸상을 하게 됐고 잠도 안방에서 같이 자고 조금씩 달라지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할머니는 6.25를 겪으시고 일제 강정기도 다 겪으셨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본말을 쓰면서 일본어로 공부를 하셨고 이름도 계명을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또 엄격하게 공부를 하셔서 00 자격증을 취득하셨다고 했다. 그 자격증은 생명과 연관이 있어서 그 당시 쉽게 딸수도 없고 무척 어려웠다고 했다. 친구 한분은 같이 배워서 취득했지만 힘들어 직업을 바꾸신 분도 있고 잘못해서 그만둔 분도 계셨다고 했다. 남자분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꺼려해서 할머니가 인기가 좋았다고 하셨다. 그때는 밤 낮 없이 부르면 새벽도 없이 거리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셨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는 늘 종아리가 아프시다고 저녁마다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공부도 잘하시고 기억력도 뛰어나셨다. 그래서 가끔 일본어로 그때를 회상하시면서 말씀하실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님 혼자서 자녀분들을 다 키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큰 아드님을 먼저 병으로 잃고 며느리는 아이들 셋을 키우고 지낸다고 하셨다. 그 자격증으로 아들 딸들 대학도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혼자서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흐뭇해하셨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참 대단하시고 배울 점이 많고 훌륭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할머니는 오랫동안 봉사단체를 만들어 회장님으로 여러 어르신들이 따르고 계셨고 그래서 집에는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봉사단체회원은 연세가 똑같지는 않았고 할아버지(남편)가 직업이 좋은 할머님도 계시고 약국 가구점 일반가게 등을 직접 운영하고 또 평범한 주부할머님도 계셨었다. 동네에 헌 집을 사서 수리해 그곳에서 모임도 하시고 음식을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셨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단체봉사활동을 나가시고 군부대에 위문을 가실 때는 음식을 해서 가시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음식도 나눠주시고 봉투를 전달하기도 하셨다. 처음에는 할머님이 혼자 다니셨었는데 언제부턴가 외출을 하실 때면 항상 내가 꼭 따라다녔다. 다른 할머님들보다 우리 할머님이 연세가 제일 많으셨고 체중이 있으셔서 늘 부축하고 다녔다. 버스나 봉고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데리고 다니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같이 가서 할머님 시중도 들고 심부름도 하고 다른 할머님들 도와드리기도 했었다. 또 친구분 자녀결혼식에도 데리고 다니셨다. 결혼식에는 불편해서 안 가려고 하니 할머님이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봉고차로 수안보온천에 갔던 일이었다. 비포장도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갔는데 이 험하고 먼데까지 왜 다니실까 속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온천에 가서 처음으로 본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한 와이키키 간판을 보고 온천을 하고 나서 궁금증이 사라졌다.
할머님들은 돌아가면서 집에서 친목을 다지는 계모임을 하시기도 했었다. 노트에 빼곡하게 쓰여있는 숫자들 1번부터 끝번호까지 1번은 이자가 많이 붙어 있었다. 내려가면서 조금씩 줄어드는데 거의 끝에 가서는 이자가 없었다. 금전이 급한 사람은 먼저 타고 그렇지 않으면 늦게 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도 월급 타서 집에 보내지 말고 계를 들라고 하셨다. 그래야 돈이 모아지고 결혼도 할 수 있다고 월급이 많지 않아서 내가 반 들고 다른 할머님이 반 들고 해서 일 년은 넣었다가 타서 은행에 저축을 하게 되고 그 재미로 또 조금씩 모아서 시골에 엄마가 사시는 집 수리할 때 붙여드리기도 했었다.
할머니가 백내장 눈수술을 하실 때 0안과병원을 다니셨었는데 그때는 0안과 간판도 작았고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이층에 진료실이 있었고 원장님이 유명해서 멀리서 진료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항상 진료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한 번은 아침 일찍 외출을 하시자고 해서 나는 병원에 가시는 줄로만 알고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곳은 백화점 정문 앞이었다. 영등포 00 백화점이 처음 오픈하는 날이라고 사람이 많아서 일찍 서두르셨는데 그곳에는 벌써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서로 들어가려고 밀리고 밀려서 하마터면 할머니 하고 넘어질 뻔했었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 문 앞에서 사람들이 들어가면 어느 선에서 못 들어가게 막아서고 그 사람들이 안에서 여기저기 구경하러 흩어지면 그때 다시 들여보내고 그런 식으로 해서 처음으로 백화점 구경을 하게 되었다. 할머님은 물건도 사지 않고 사람이 많아서 구경도 제대로 못 하고 그냥 나오셨다.
병원에 같이 다니실 때뿐 아니라 집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내가 할머님보호자가 되었다.
그렇게 점점 할머님과 가까워지고 비가족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