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장 크고 깊은 냄비에 끓인 곰국은 소고깃국을 다 먹고 난 후 추운 겨울이 되면 오래 두고 먹던 음식이다. 우리 집에서 끓인 곰국은 요즘 나오는 시판 곰국처럼 흰 물감을 탄 것과 같은 뽀얀 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한 맛이 참 좋았다. 특히 우족이나 도가니를 넣고 곰국을 끓일 때는 가끔씩 국에 걸리는 도가니 조각이 참 맛있었다. 비계도 고기도 아닌 도가니는 소금을 넣은 국물이 잔뜩 배어 있었고 입에서 후루룩 넘어가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쌀뜨물 색의 곰국을 처음 먹는 날에는 살코기들도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 고기들은 구워 먹는 고기들과 다르게 결대로 찢어져 있는 고기였는데, 나는 이것을 '고사리 고기'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국에 들어 있는 고기를 건져 소금에 찍어 밥과 함께 먹는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입이 짧은 동생도 고기가 가득한 곰국을 먹는 날에는 밥을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어느 겨울, 곰국을 끓였던 날, 아빠의 제자들이 집으로 놀러 왔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 뭘 하고 갔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곰국 한 그릇씩을 먹던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나와 동생이 인상 깊게 본 것은, 밥 한 공기를 뒤집어서 국물에 풍덩 하고 말아먹는 것이었다. 곰국에는 항상 밥을 말아먹었는데, 우리에게 엄마와 할머니는 "밥 남길 수도 있으니 한 그릇 다 말지 말아라." 하셨기 때문이다. 밥공기를 뒤집어 국물에 마는 그 모습이 멋있어 보여 흉내 내었다가 불어난 밥알에 한참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고기를 다 건져 먹고 나면. 국물만 남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진정한 곰국의 시기이다. 우리 집에서는 곰국에 넣어 먹는 부재료들이 다양했다. 곰국이 상에 오르는 동안에는 언제나 소금과 후추, 다진 파, 그리고 다진 김치가 상에 올랐다. 설렁탕이나 국밥에 깍두기를 넣어 먹듯이, 우리 집에서는 다진 배추김치를 곰국에 넣어 먹었다. 또 새로 들여온 신선한 달걀이 있는 날이면 날달걀을 넣어 먹었다. 그릇에 미리 달걀을 깨서 넣고, 팔팔 끓는 곰국 국물을 떠 넣으면 달걀이 수란처럼 익었다. 국물과 함께 호로록 넘어가는 달걀의 맛은 참 고소했다.
우리 집에서는 곰국은 정말 국 그 자체였는데, 서울에 가니 곰국 국물을 이용한 음식들이 참 많았다. 어릴 적 먹던 칼국수는 대부분 멸치 육수 혹은 조개 육수에 담백하게 끓인 것이었다면, 서울에서는 사골 칼국수가 있어 신기했다. 김치찌개에도, 부대찌개도 사골 육수를 이용한 집들이 많았다. 우리 시어머니는 설날의 떡만둣국도 항상 이 곰국 국물로 끓이셨다. 멸치 육수에 국간장과 소고기 꾸미로 간을 한 친정의 떡국이 개운하고 담백한 맛이었다면, 곰국에 끓인 떡만둣국은 진하고 든든한 맛이 났다.
옛날에는 곰국을 한번 끓이려면 많은 양을 끓여야만 했고, 그만큼 힘도 많이 들었다. 서너 식구 사는 집에서는 곰국을 한 솥 끓여 다 먹어 내는 것도 힘든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정육점에서 곰국을 팔기 시작했다. 큰 노력 없이도 진하고 맛있는 곰국을 쉽게 사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곰국을 먹는 첫날의 고기 가득한 곰국을 먹으려면 엄마의 노력이 조금은 필요하다. 내일은 정육점에 가서, 도가니 한 팩과 양지머리 한 팩, 사태 한 팩을 사서 수육도 만들고, 진한 국물도 한 냄비 사 와서 고기 가득 들어 있는 곰국을 상에 내어야겠다.